【사는 이야기】 이웃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5.06 17:53 | 최종 수정 2022.06.13 15:21 의견 0

아침 일찍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약간의 불안을 내포한다. 낯선 번호일 때는 그 불안이 무게를 더한다. 받고 싶지 않을 때도 많지만, 혹시 그 알량한 원고청탁일까봐 끝내 수신을 선택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뾰족했고 어렵잖게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예!”

경직된 내 목소리는 상대방의 경직을 유도하기 마련이다. 여자의 목소리가 공포영화를 찍다가 세 번쯤 NG를 낸 배우의 그것처럼 가늘게 떨린다.

“저, 저, 죄송한데요. 혹시, 68버에 **** 차량….”

더 들을 것도 없다. 어느 서툰 운전자가 주차를 하다가 내 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목소리는 안 나온다. 이번엔 내가 당황스럽다. 비록 중고이긴 하지만 산악지대를 누비며 하는 일 때문에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산 사륜구동차다. 그 빚에 치여 내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있는지 안다면 절대 들이박으면 안 된다.

“맞는데요?”

내 목소리가 얼마나 딱딱한지 내가 들어도 나무 막대기 같다.

“예, 그런데, 제가… 아니, 죄송해요. 제 고양이가, 그 차로 들어갔어요?”

“차로 고양이가요? 문을 잠가놨는데요?”

“그게 아니라 차 밑으로 해서 엔진 쪽에 들어갔나 봐요. 얼른 오셔서 본네트(보닛, bonnet)를 좀 열어주셔야….”

“별일이 다 있군요. 지금 가겠습니다.”

내려가보니 길에 세워놓은 내 차 주변으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다. 내게 전화를 건 게 틀림없는 여자는 경찰 두 명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와중에도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보통 당황한 모습이 아니다. 30대 초중반쯤 됐으려나? 나는 여전히 여성의 나이를 가늠하는 일에 서툴다. 내가 도착하는 순간 인수인계라도 하듯 경찰관들이 순찰차를 타고 떠난다. 여자가 과도하게 나를 반긴다. 보닛 위에는 나에게 남긴 듯한 편지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제발... 로 시작되는 편지다. 요즘은 차를 하루만 내놓아도, 특히 검은 차는 먼지가 뽀얗게 앉으니 손가락 글씨 쓰기엔 참 좋다. 차 유리창 안에 전화번호가 있는데도 당황해서 못 본 것 같다. 그렇다고 남의 차를 낙서판으로 만들다니. 기분이 슬슬 안 좋아진다.


“안에 전화번호가 있는데, 왜 전화를 안 하고….”

“제가 당황해서 못 봤어요. 다른 분들이 보고 알려주셔서 전화를 드린 거예요.”

내 차 앞에서 한 시간 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119에도 연락하고 경찰도 부른 것이다.

나는 묵묵히 차 문을 열고 보닛 레버를 당긴다. 보닛이 다 열리기도 전에 여자가 외친다.

“있어요. 있어! 여기 있어요.”

복잡하게 얽힌 쇳덩이들 사이로 노란 줄무늬의 고양이 머리가 살짝 보인다. 덩치가 제법 크다.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다. 저 녀석은 왜 저길 들어가서 속을 썩인담?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나도 세상이 싫어 여기까지 와서 숨어 살지 않는가. 여자가 애타는 목소리로 고양이를 부른다. 사설조로 뭐라뭐라고 하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즤들끼리의 은어인 모양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끝내 못 들은 척 외면한다.


내내 고양이를 부르던 여자가 내게 다가와 간절한 눈빛을 던진다.

“아까 누가 그러는데, 정 안 나오면 공업사로 끌고 가서 엔진을 들어내고 꺼내야 한다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비용은 제가 댈게요.”

이 아가씨(?)가 아침부터 못 드실 걸 드셨나. 내게는 금방 뺀 새 차와 다름없는데, 이 소중한 것의 엔진을 들어내? 뇌 한쪽에서 ‘승질’이 무럭무럭 자란다. 지금 이 순간 머리 꼭대기에서 김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런 조언을 한 녀석은 또 누구란 말인가? 제 차라도 덜컥 그렇게 말했을까? 그래도 고양이주인의 애타는 심정을 생각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일단 최대한 설득해 보세요.”

아가씨 하나가 손에 뭔가 잔뜩 들고 오더니 고양이 주인에게 건넨다. 고양이 간식이다.

“이걸로 불러내 보세요.”

건너편 커피집 아르바이트 학생이다. 눈엔 걱정이 가득하다. 저런 눈빛의 아가씨들은 대개 집에 고양이 한두 마리쯤은 키운다. 아니다. 근본적으로 착한 사람이다. 그렇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 참 고운 마음씨다. 아침 청소로 바쁠 시간인데. 분노 게이지가 살짝 내려간다.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 하나도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간다. 관심들이 많구나. 분노 게이지를 살짝 더 내린다.

정작 내 눈에 ‘특별하게’ 들어온 사람은 정장을 잘 갖춰 입은 40~50대 사내다. 내가 내려갔을 때부터 보였는데,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하고 있다.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고양이 구출’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 여기저기 물어보는 것 같다. 표정이 심각한 게 진심 100%라고 씌어 있다. 저런 사람도 있구나. 남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끝까지 도와주려는 사람. 분노 게이지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나도 뭔가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차주 아닌가? 내 차가 여기 없었다면 고양이도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내 생각을 자르며 남자가 고양이주인에게 말한다.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레커를 불러서 앞을 들어 올린 다음에 꺼내는 방법이 가장 좋다네요?”

“레커차요?”

여자는 차에 대해서 조금도 모른다. 운전은 아예 못 하고 당연히 차를 가져본 적도 없다고 한다. 레커가 동네마다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누군가가 찾아서 불러야 한다. 비용이 발생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여자만 모른다. 하나 예외가 있다면 내가 보험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얼른 보험사 전화번호를 찾는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보험사들은 급할 때 연결하기가 참 어렵다. 이름과 서비스 받을 항목, 주민번호 앞자리까지 끊임없이 누르고 외친 끝에 상담사가 연결돼서 고양이 구출에 대해 의논했다. 잠시 뒤 레커 기사가 전화를 했고, 그로부터 15분 후에 도착한다는 낭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정장 사내는 그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말을 걸었다.

“아침에 바쁘실 텐데, 여기서 시간을 다 보내시네요.”

“제 사무실이 저쪽이에요. 출근해서 차를 대는데, 이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길래 와봤더니….”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됐다. 바로 앞 건물 작업실에서 글 쓰는 작자('작가'의 오타 아님)라는 내 소개와 고양이와 개에 관련된 사업을 하는 회사 대표라는 그의 소개를 맞교환했다. 글 쓴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유난히 반색한다. 자신의 부친이 모 대학 문창과 교수를 지내고 정년 퇴임한 누구누구란다. 어휴, 선배 아들인데 성질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나보다 나이는 한참 적어 보이지만 무척 점잖은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 살고 있구나. 작가의 아들이라 그런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레커가 도착했다. 레커 기사는 키가 크고 덩치도 큰 30대 초반쯤의 사내였다. 냉큼 차부터 들어 올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물을 뿌리는 큰 병과 꼬챙이 하나를 꺼내 들고 보닛 앞에 선다. 대장정을 떠나는 돈키호테처럼 비장한 얼굴이다. 다른 묘책이 있나? 그가 물병의 압력을 높이더니 고양이 얼굴에 칙칙 뿌린다. 하지만 고양이는 꼼짝도 안 한다. 이번엔 꼬챙이로 살살 어른다. 그래도 고양이는 꼼짝 안 한다. 이번엔 물을 뿌리는 것과 동시에 꼬챙이로 어른다. 말은 쉽지만 그 과정이 20분 가까이 걸렸다. 한순간 덩치 큰 사내의 환호성이 울렸다.

“나왔다!!!”

100년짜리 삼을 본 심마니의 외침이 그랬을까? 이어서 고양이주인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역도선수처럼 환호한다. 나와 정장도 환희의 외침을 아끼지 않는다. 졸지에 내가 사는 동네가 축제장이 된다. 잘하면 얼싸안고 춤이라도 출 기세다.

레커 기사에게 물었다.

“이런 일 자주 있어요?”

“그럼요. 엄청 많아요. 우리에겐 이런 거 일도 아니에요.”

그랬구나. 고양이가 자동차 엔진의 온도를 즐긴다는 건 뉴스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나오게 하는 노하우도 생겼겠지. 기사가 승자의 미소를 풀풀 뿌리며 레커를 몰고 사라졌다.

헤피엔딩의 뒤에 남은 세 사람은 묵묵히 미소를 교환했다. 여자가 말했다.

“가까운데 계시니까, 제가 연락 드릴게요. 고마운 분들이니 밥 한 번 사겠습니다.”

난 술이 더 좋은데…. 뭐 반주 곁들인 밥도 괜찮고. 정장 사내도 그렇고, 오케스트라 전속 작곡가라는 고양이주인도 그렇고, 든든한 이웃이 생겼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오전 일 펑크난 건 어쩌지? 전화를 받고 무려 한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작업실로 올라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세상은 늘 이만큼 살만한 곳이야. 그러니 나같은 사회부적응자도 살아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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