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아침 산행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5.16 10:04 | 최종 수정 2022.06.13 15:25 의견 0

아침마다 산으로 갑니다. 처음엔 제 안에서 독충처럼 바글거리는 생각들을 지워보겠다고 나섰는데 이제는 여섯 시면 눈이 저절로 떠집니다.

정상에 오르겠다고 욕심을 낸 적은 없습니다. 산이 열어주는 품만큼 걷다가, 어느 곳이든 ‘여기다’ 싶으면 돌아서서 내려옵니다. 일부러 험한 길을 택하지도 않습니다. 이른 소풍 길에 나선 아기 다람쥐가 여기저기 해찰을 부리느라 걸음이 늦어지고, 벌레 찾으러 나온 까치가 모둠발로 총총총 뛰어가는 그런 길을 걷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노래 한 자락 들려주고 내려옵니다. 어제는 「산장의 여인」을 불렀습니다. 새들의 재청을 받아서 세 번이나 불렀습니다. 대신 오늘은 슬그머니 내려왔습니다.

날마다 똑같아 보이는 산만큼, 날마다 달라지는 곳도 없습니다. 걷다가 눈을 들어보면 새들이 시간을 물고 훨훨 날아갑니다. 꽃들도 시침 분침을 나눠들고 저만치 앞서가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처음 오를 땐 바람소리에 놀란 진달래가 후드득 피고 지더니, 어느 날 철쭉이 다녀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아카시아 꽃이 피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주는 만큼 받아가지고 내려옵니다. 향기만 한 아름 안고 오는 날도 있습니다.


수백 년 살았음직한 나무도 있습니다. 나무도 오래 살면 신성이 깃듭니다. 그 앞에서는 조심조심 걷습니다. 그 순간은 온 산에 그 나무 하나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이만치 내려와 바라보면 나무는 어느덧 흐려져 있습니다. 대신 거기 숲이 술렁거립니다. 나무 앞에서는 나무만 보이다가 숲에서는 숲만 보입니다. 하지만 숲을 떠나 이만치 서면 나무도 숲도 없습니다. 산이라는 이름 하나 남습니다. 어쩌면 저는 여전히 허상 속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무엇도 특별히 대단하다고 큰 소리 칠 수는 없습니다. 고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나무도 숲도 산도 아니고, 고통은 나무이기도 하고 숲이기도 하고 산이기도 합니다. 지금 거센 파도처럼 나를 덮치는 번뇌도, 지나고 난 뒤 돌아보면 작은 물결일 뿐입니다.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이르는 말입니다.

떠나있다고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산에 오를 때마다 페북에서 만난 인연들을 생각합니다. 떠나있으면 안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무도 숲도 산도 페북 안에 있습니다. 어느 날은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오래 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제게 맡겨진 배역은 여전히 울고 싶은 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입니다. 우는 것보다는 손을 잡아주고 눈물 훔쳐 주는 것이 제게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압니다.

비가 온 다음 날 아침은 숲이 유난히 수런거립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좋은 국수집도 봐뒀습니다.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