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도서관에서 만난 부자(父子)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6.07 09:00 | 최종 수정 2022.06.13 15:27 의견 0

청년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려 넣은 것 같은 표정으로 도서관 열람실 책상 앞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서너 권의 책이 쌓여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청년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마치 ‘미소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두서너 살 어려 보였습니다. 저 친구는 왜 저러고만 있을까? 도서관에 왔으면 책을 읽어야지. 오지랖 넓은 저는 자료를 찾기에 바쁜 와중에도 눈길이 자꾸 청년에게로 향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가도 그 청년은 그 자세 그대로 있었습니다. 책장 한 번 들춰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도서관을 찾은 지 최소 7~8년 정도는 된 것 같았습니다. 도서대출증을 꺼내보니, 그 얇은 증명서 안에 10년 이상의 공백이 화석처럼 찍혀 있었습니다. 한때 자주 다녔지만, 어쩌다 보니 발길을 끊었던 곳입니다.

글을 쓰다가 꼭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다시 찾은 참이었습니다. 도서관은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서점과 도서관이 다른 점을 쓰라면, 도서관 쪽에 ‘10년이 흘러도 변화가 없다’라고 적어 넣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청년은 여전히 동상처럼 앉아있었습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완고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제 눈을 비비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책을 한 권 든 중년 남자가 다가오더니 청년 앞에 섰습니다. 조금 뒤 청년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합니다.

언뜻 언뜻 들리는 단어들을 조합해 보면 “아버지는 책 더 찾아 올 테니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습니다. 그린 듯한 미소도 여전히 입가에 물고 있었습니다. 중년남자는 서두는 걸음으로 다시 서고로 갔습니다.

제가 깜짝 놀란 것은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이들 부자를 다시 보다니. 순식간에 낡은 사진 한 장이 그들 위에 오버랩되었습니다. 기시감이 아니었습니다.

똑 같은 장면을 7~8년 전에 본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다만 청년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습니다. 말 그대로 ‘아이’였지요. 아버지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상황이 짐작됐습니다. 청년은 소위 말하는 ‘발달장애’(혼자 짐작으로 이런 용어를 꺼내는 건 늘 두렵습니다)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 돌봐줘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청년에게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지는 짐작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책을 매개로 일을 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계속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려가야 할 상황인 게지요. 아이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으니 데리고 나온 것일 테고요. 그대로 앉아있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언제 어찌 될지 모르니, 책을 찾는 중에 끊임없이 와서 확인하고 다시 당부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짐작해보건대 그렇게 보낸 세월이 최소로 잡아도 7~8년이었습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는 일이고요. 물론 제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요. 타인의 삶을 내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무척 위험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상황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바쁜 걸음은 여러 번 계속 되고, 시간을 깔고 앉은 아들의 기다림 역시 계속되었습니다. 책상에 책이 여덟 권이 쌓인 순간 아버지의 걸음이 멈춰졌습니다.

“OO야, 이젠, 가자.” 청년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뒤를 따랐습니다. 제 눈길도 그들 부자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언제나 또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제 일방적인 인연은 거기가 끝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작은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가던 청년이 흘끗 뒤를 돌아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슬그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소리가 날까봐, 다른 책 읽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아주 조심스럽게 말입니다. 의자를 다 밀어 넣은 청년이 이번에는 정말 아버지를 따라 열람실의 문을 나섰습니다. 제가 전하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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