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물고기】 3-허공의 틀을 부숴라(打破虛空骨)

혜범 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1.06.16 11:21 | 최종 수정 2021.06.16 16:08 의견 0

그림 : 정운자/시인ㆍ수채화가

학인(學人)은 새벽 잠에서 깨었습니다. 일어나보니 노사(老師)의 누비 두루마기가 학인의 몸에 덮여 있었습니다.

학인: 스님 문안드립니다.

노사: 문안은 뭐.

학인: 지난 밤 꿈이 따뜻했습니다.

학인은 방문(房門)을 열고 들어가 노사의 두루마기를 우편(右便)에 놓고 삼배를 올렸다.

노사: 꿈이 따스했다고?

학인: 시퍼런 칼날인데 덮고 잠들어 깨어보니 다칠까 두려웠습니다.

노사: 추우면 죽고 따스하면 산다.

학인: 스님?

노사: 응?

학인: 세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루어지고 머무르고 붕괴되고 사라져 버린다)이 있고, 우리 몸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우리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이 있어 생겨났다 잠시 모습을 유지하다, 그게 얼마 안 가 그놈이 변질되고 사라집니다.

노사: 그런데?

학인: 무상(無常, 만물은 항상 변하며 영원한 실체로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합니다.

노사: 무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루 꿰고 있구나. 허공의 틀을 부숴라(打破虛空骨).

학인: ….

노사: 번뇌를 아는 것도 너의 마음이고, 번뇌를 끊으려 하는 것도 너의 마음이다. 그래, 너는 길 잃은 미접(迷蝶), 길 잃은 나비인가?

학인: ….

노사: 그래, 그 날개를 어디에 두었느냐?

학인: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을 날고 있습니다.

노사: 그래? 그리 날아 꿈 어디로 가려고?

학인: 쉽게 말씀해 주시지요.

노사: 바깥만 보지 말고 안살림을 좀 들여다보란 말이다.

학인: 죽기 위해서 나는 것이고, 이 세상은 다 장차 파괴되는 것이며, 만나는 자는 다 헤어지는 것인데 무서워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노사: 아이고, 이 구만리 장천이라는 우물 속, 무기(無記)에 빠진 미접승(迷蝶僧)아. 나고 죽는 법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없는 이치거늘, 나고 죽는 것에 집념해 걱정할 것이 뭐 있는가?

학인: ….

노사: 저 꽃 속에 미접의 나비들 아직도 꿈속을 팔랑거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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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접승(迷蝶僧), 선가(禪家)에서 불교, 평화, 깨달음을 말하지 못하고 무기(無記)에 빠진 중들을 일컫는 말이다.

혜범 스님은 1976년에 입산했다. 현재 강원도 원주 송정암에서 수행하고 있다. 199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다, 뭍, 바람>으로 등단했다. 1992년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이 영화화되었으며, 1993년 대전일보에 장편소설 <불꽃바람>을 연재했고, 1996년 대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최근 문학세계사에서 <소설 반야심경>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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