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고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이 된다.

대학시절 읽고 그 후 20여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최인훈의 어느 작품 속 한 구절이다. <광장>이나 <회색인>, 아니면 그의 또 다른 작품인지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작품 제목 하나를 제대로 올리기 위해 오랜 세월 내 ‘기억의 서가’에 곱게 내려앉은 먼지를 억지로 털어내고픈 마음도 없다.

소년시절 북녘땅에서 해방과 전쟁을 만나고, 이후 월남하여 분단의 삶을 살아온 작가 최인훈의 ‘잃어버리고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은 고스란히 그의 인생이자 작품이 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내게도 지워질 수 없는 공감으로 남았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절실함의 차이가 있고 심정적인 색조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런 공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2004년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국제 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 방북대표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왔다. 3박4일의 짧은 일정은 벅차고, 힘겹고, 무거운 길이었다. 그 길은 시간과 공간의 단절을 압축해 뛰어넘는 여정이기도 했다. 시간여행, 축지법은 관념의 소산만은 아니었다. 물리학은 몇 십만 광년 거리의 우주 저편으로 가기 위해 공간의 주름을 잡고 타임터널을 통과하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성과 감각의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정녕 은총이다. 평양과 백두산, 남포 일대를 돌아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복잡한 소회에 시달렸다. 하지만 남과 북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단절을 단 며칠 동안에 관통하는 저 작업의 의미를 내 지각이 남김없이 인식했다면, 아마 나는 일정 도중 어느 지점에서 차라리 산화하고 말았으리라.

평양 주체사상탑 광장에서 바라본 인민대학습당 ⓒ유성문(2004)

첫째 날, 평양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전세기가 ‘디귿’자 모양(남쪽 영공→서해상 공해→북측 영공)의 항로를 타고 에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는 데에는 1시간 남짓이면 충분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제껏 나를 지배해왔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들이 뭉텅 잘려나가 버린 것 같은 막막함이 일시에 엄습해왔다.

‘평양 PYONG YANG’-. 텅 비어 적막하기까지 한 활주로 건너편에 덩그렇게 서 있는 공항청사의 붉은 글자만이 현실의 좌표를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붉은 글자 사이로 난 조그만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왔을 때, 가장 낯익은 듯하면서도 가장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는 평양이었고, 나는 그곳에 들어선 어설픈 틈입자였다.

평양 주체사상탑 광장에서 ⓒ유성문(2004)

막바지 ‘모내기 전투’가 한창인 들판을 내달려 평양 도심에 들어선 후, 우리 일행이 처음 부려진(?) 곳은 만수대였다. 높이가 무려 23미터에 이른다는 김일성 주석의 대형 동상이 보는 이를 압도하며 서 있는 곳. 그래서 어쩌면 평양의 관문은 순안이 아니라 만수대였다. 23미터라면 9층 빌딩 높이이다. 한때 유행했던 ‘눈높이’라는 관점에서는 ‘일단 통과’라고 해야 될까.

인간의 사상과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렇다. 흔히 말하는 똘레랑스의 원칙,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누군가 당신의 그런 사상의 자유를 부인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자세이다. 저렇게 높이 솟아있는 권위 앞에서 그보다 낮은 사람들이 과연 ‘동의하지 않을 용기’를 갖는다는 게 쉬운 일, 아니 가능키나 한 일일까.

나는 이제껏 매머드화된 대형 교회의 거대한 첨탑이 아니라 시골 교회의 소박한 십자가에서 예수를 더 느끼곤 했다. 국보급 문화재들이 아니라 노방의 작은 풀꽃들을 통해 이 땅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가슴 저리곤 했었다. 결국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가치를 입증한다. 10년, 반세기, 1세기 뒤에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평양 주체사상탑 광장에서 만난 소년 ⓒ유성문(2004)

오히려 나에게 평양의 오늘을 상징적으로 느끼게 해준 것은 주체사상탑 아래에서 만난 한 소년이었다. 주체사상탑에 이르는 계단을 홀로 터벅터벅 오르는 소년을 불러 세웠을 때, 돌아보는 소년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호기심 같은 것이 묘하게 섞여 있어 나를 서늘하게 했다. 더욱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소년이 쓰고 있는 빨간 모자였다. 그 모자의 한 귀퉁이에는 너무도 뚜렷하게 날아갈 듯한 ‘나이키’ 심볼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 주석의 고향집인 만경대 방문을 끝으로 평양 참관 일정을 마친 후, 저녁에는 숙소인 양각도호텔에서 북측이 마련한 환영만찬이 열렸다. 환대와 정성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식탁에서 처음 맛보는 북한 음식은 각별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는 민망함과 불편스러움이 내가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애꿎은 소주만 죽이고 있었고, 동석한 북측 참사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 냅시다(아마도 ‘쭉 듭시다’인 듯)”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래요, 이 선생. 이왕 낸 김에 통일까지 쭉 냅시다. 무참해진 나는 차마 그 말마저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평양 양각도호텔에서 내려다본 대동강 ⓒ유성문(2004)

둘째 날, 백두산

평양에서의 첫날밤은 너무도 짧았다. 설레임 때문이 아니라 빡빡한 백두산 방문 일정 때문에 우리는 새벽부터 설쳐대야 했다. 호텔 밖으로 나서니 간밤에 내린 ‘해원의 비’로 대동강은 젖어 있었다. 새벽녘, 양각도를 감싸고 흐르는 대동강은 너무도 잠잠하여 마치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고, 흐린 날씨로 탁해진 물빛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었다.

백두산 가는 길은 의외로 수월했다. 순안공항에서 삼지연공항까지 1시간 거리를 쌍발기로 이동, 삼지연공항에서 백두산 천지까지는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가 삼지연공항으로 서서히 내려설 무렵부터 눈앞으로는 전혀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저히 고지대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드넓은 평원 위로는 그리 울울하지 않은 관목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런 풍경을 어디서 보았을까. 40여년 이상 반도의 남쪽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내 일상의 경험에서 접했던 풍경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영화나 사진에서 스쳐 지나갔던 이국의 풍경이 지금 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백두산 천지 ⓒ유성문(2004)

더욱 놀라운 광경은 버스가 본격적으로 백두산 정상 부위를 타고 오를 때부터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이었다.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오방색으로 펼쳐진 들꽃세상. 노란만병초꽃, 개불알꽃, 하늘매발톱꽃, 두메양귀비꽃, 제비붓꽃, 서범꼬리꽃, 꽃… 꽃… 꽃. 그 꽃들은 너무 작아서 미칠 듯 사랑스러웠고, 너무 아름다워서 이내 슬펐다.

나는 불현듯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맨발로 그 꽃밭 사이를 거닐기도 하고, 이유 없이 깔깔거리며 뛰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마침내 솜털처럼 가볍게 화원 위를 날아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무심한 버스는 말없이 산을 타고 자꾸만 기어오를 뿐이었다.

천지. 전쟁과 분단의 깊은 상흔을 앓고 있는 한반도의 정수리. 그토록 영험하다는 만병초 때문이었을까. 아픈 반도의 이마는 놀랍도록 서늘했다. 이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오른 나는 잠시 깊은 묵상에 빠졌다.

‘엎드려 울어보지 않고 어찌 슬픔을 알겠으며, 숨죽여 노래해보지 않고 어찌 희망을 말하겠습니까.’

삼지연전적지 ⓒ유성문(2004)

하산은 다른 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붓한 폭포, 결국은 압록강으로 흘러들어갈 유쾌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우리는 제법 평평한 풀밭에 자리를 잡았다. ‘곽밥(도시락)’이 돌려지고 풀밭 위의 식사는 자못 유쾌했다. 여기저기서 맥주 아니면 ‘단물잔’을 치켜올리며 “지화자”, “좋구나”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잠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가 저 멀리 아련한 백두의 영봉으로 되돌아갔다.

백두밀영과 삼지연에 이르는 일정을 따라가면서 북한 체류기간 동안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젊은 박경선 전도사는 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또래의 북측 여성 안내원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였으며, 잠깐 동안이라도 함께 거닐며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주로 “몇 살이냐, 고향이 어디냐” 따위의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남남(南男)’은 솔직했고, ‘북녀(北女)’는 수줍어했다. 그 순수함이, 그 풋풋함이 나는 더없이 부러웠다.

통일은 이념의 문제이기도 하고, 정치나 경제, 그리고 국제관계 등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실천의 출발신호를 올리는 것도, 그리고 궁극적인 화해와 통일의 지점에서 울며 웃는 주인공도 바로 이런 순수와 열정은 아닐는지.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전쟁과 분단, 그 역사의 무게가 갑자기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불구의 역사, 불구의 삶을 살아왔다는 반증이었을까.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 1장 4, 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