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창포길 통신】 오토바이 노인과 봄보리 청년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9.23 09:00 의견 0

화살비처럼 쏟아지는 뙤약볕을 고스란히 이고 치과에 가는 길이었다.* 9월이라고, 그래서 가을이 왔다고 떠들어도 한낮의 햇살은 한여름 못지않게 날카롭고 뜨겁다. 그렇다고 버스를 탈 내가 아니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몇 정거장 정도는 걸어가는 게 훨씬 행복하다.

목적지가 저만치 보일 무렵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생각했다. 사십 몇 년 전 오늘은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이 시간쯤 오리걸음으로 ‘눈물고개’를 오르고 있었을까? 느닷없이 군가가 귀에 쟁쟁 울렸다. 난 평생 운도 없지. 하필 한여름에 입대해서…. 별 도움 안 되는 추억으로 목마름을 달래고 있는데, 그 사고가 일어났다.

그가, 아니 그가 탄 오토바이가 왜 느닷없이 넘어졌는지는 모른다. 난 그때 한참 ‘눈물고개’의 환영 속에서 군가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가 한눈을 팔았거나 오토바이를 세운 자리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급경사였을 수도 있다. 한 사내(라고 해두자)가 탄 오토바이가 느닷없이 넘어지더니, 오토바이에서 내던져진 사람이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었다. 아니 안간힘을 쓰는데도 일어설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길 건너에서 지켜본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가서 구해줘야 하는데. 많이 다쳤으면 119라도 불러야 하는데…. 하지만 마음이 급하니 신호는 더 바뀔 기미가 없었다. 교통법규고 뭐고 무시하고 무단 횡단을 하려고 해도 하필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잘도 건너가더구먼. 아아! 어쩌지? 어쩌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모퉁이를 돌아온 청년 하나가 얼른 넘어진 오토바이 곁으로 다가갔다. 모른 척 또는 바쁜 척 지나갈 수도 있으련만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멀리서 봐도 착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청년은 잠시 난감한 눈치였다. 여전히 길에 누운 사내에게 뭔가 말을 거는가 싶더니 넘어진 오토바이부터 일으켜 세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오토바이가 유난히 무거운지, 청년이 유난히 힘이 없는지, 오토바이는 일어날 기색이 아니었다.

청년은 오토바이를 포기하고 길에 누워 있는 사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웠다. 사내부터 일으켜 세우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일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꽤 덩치가 큰 사내는 영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었다.


스프린터처럼 달려가 우선 청년과 함께 사내를 일으켰다. 둘이 힘을 합치니 큰 덩치도 별 저항 없이 일어섰다. 세워놓고 여기저기 살펴봐도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물었다.

“어디 특별히 아픈 덴 없어요? 엠뷸런스라도 부를까요?”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헬멧 속의 남자는 사내라기보다는 노인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70대 중반쯤? 넘어진 오토바이가 길바닥에 편지 같은 걸 잔뜩 토해놓았다. 언뜻 보니 신용카드 봉투였다. 그러니까, 이 노인은 오토바이를 타고 카드 배달을 다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치열한 삶 앞에 잠시 숙연해졌다. 늙어도 쉴 수 없는 고단은 내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노인이 자꾸 팔을 주물렀다. 팔꿈치 쪽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소매를 걷어보니 피부가 벗겨져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움직여보라고 했더니 더 이상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냐고 여러 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육체는 젊은 사람과 많이 다르다. 그는 괜찮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청년을 눈짓으로 불러 오토바이를 세웠다. 여기저기 흩어진 신용카드 뭉치를 주워서 통에 담아주고 시계를 보니 치과 예약시간이 다 돼 있었다. 청년도 끝까지 남아 뒷마무리를 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노인의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물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연신 고맙다는 말만 했다. 난 청년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

스물이나 넘었을까? 학교에 다닌다면 대학 1학년쯤 돼 보이는, 아직은 봄보리처럼 푸른 청년이 괜찮다며 수줍게 웃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끝까지 넘어진 노인을 챙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풋풋한 미소는 또 얼마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지.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험험! 내가 이런 청년이 사는 동네에 살고 있다니까? 누구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 대개의 청년은 여전히 착하다구. 우리의 미래라니까. 그리고 대개의 노인들은 여전히 훌륭해. 평생 일하고도 쉬지 못하는 저분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 태극기 부대는 또 그들의 삶이고.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우이씨~ 치과 실장님에게 늦었다고 혼나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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