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어느 땡중의 겨울나기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1.09 09:00 의견 0

1. 30 몇 년 전이었다. 타자기를 쓸 때였다.

바케쓰(양동이)를 들고 물을 뜨러 가니 샘이 얼었다. 산토끼도, 새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망치를 들고 다시 샘으로 올라가 얼음을 깼다. 바케쓰에 물을 긷고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루가 물 마시러 내려오고 있었다. 산토끼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도 그렇고 먹거리도 그렇고 수은주를 보니 영하 21도였다. 방에 떠다 놓은 물도 얼어 있었다. 가까이 큰 절에 아는 스님이 살았다. 걸망에 빨래거리를 잔뜩 넣고 가니 싫어했다. 내 차암 드러워서.

그때 내가 사는 읍내에는 여관 방에 컴퓨터가 있는 곳은 딱 한 곳, 백악관 뿐이었다. 주인은 내가 아는 불자였다. 남편은 국어 선생이었던. 여관비는 반값이었다. tv도 있었다, 야한 채널도 있었다. 사흘 간 피난하는 동안 타자로 쳤던 소설 원고를 컴퓨터 화일로 만들 수 있었다. 아침 저녁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축복을 누렸다. 소설 업보를 썼고 호의호식 할 수 있었다. 새들 모이도 주었다.

2. 그렇게 호신불을 모신 채 텐트를 치고 오 년을 살았다. 마지막 전주에서 절골, 나의 열반터까지는 거리가 148미터였다. 마지막 전주에서 1미터에 사만 팔천원이었다. 50미터 까지는 무료였고, 소설 <업보>를 탈고 하고 넘기자 이윽고 마침내 전기를 놓을 수 있었다.

밤이면 불빛을 보고 고라니들이 쾡쾡 울었다. 그때, 법왕청 신문을 담당하던 서경보 스님의 제자, 담마가 기뻐하며 흔쾌히 삼성 컴퓨터와 프린터를 시주하고 갔다.


3. 그렇게 오 년 후 구들장이 있는 초막 하나 지을 수 있었다. 소설 <미륵>을 탈고했다. <천기를 누설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모 일간지에 연재했던 거였다. 영화 뻘을 만들었던 이만 감독이었다. 계약했다. 계약이 깨졌다. 계약금의 반을 반환 했다. 또 다른 영화사에서 제의가 왔다. 계약했다. 그렇게 몇 권 영화 원작 판권료도 받고.

멧돼지들이 절마당을 뛰어다녔다. 진돗개 백구를 피해

그래도 물을 팠다. 알바를 했다. 대공이었다. 근 천 여 만원이 넘게 들었다. 연재하고 책 내고 절 짓고 영화 판권료, 생활비로 다 들어갔다. 또 개털이 되었다. 다시 또 스님의 알바를 시작했다.

4. 그러던 백구가 나를 지켜주던 진돗개가 18년을 살고 죽었다. 개로서는 오래 산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또 글을 썼다. 쓰고 또 썼다. 물과 보일러는 얼어 터지고 얼마나 추운지 심지어 정화조까지 얼었다. 보일러실 보온을 철저하게 됐다.

수도는 뜨거운 물을 쫄쫄 흐르게 했다. 쫄쫄쫄. 하수관에 뽁뽁이와 함께 보온 덮게로 덮을 줄도 알게 되었다. 물론 정화조도 마찬가지다.

백구의 손자, 보리가 왔다. 보리가 와도 워낙 추우면 얼고 터지고 녹이고 터진 거 막는 건 마찬가지였다. 수도가 또 얼었다. 어느새 나는 압력밥솥으로 얼어버린 수도관 녹일 줄도 알게 되었다. 언 수도를 녹이니 어느덧 그렇게 나는 60대 중반을 훨 넘기고 있었다.

난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의 물이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뽀글뽀글 끓는다. 올해도 동짓밤을 잘 보내고 이 무슨 엄청난 크나큰 영광인지....이제사 그 생이 그 얼마나 고마운 지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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