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삶은 佛向上(불향상), 깨달음으로 가는 길, 부처로 나아가는 삶이다. 흔히들 선禪을 운외지치(韻外之致)라 한다.
선객은 걸림이 없는 삶, 막힘이 없는 삶을 지향한다.
한 스님이 사공도司空圖(837-908)에게 물었다.
남은 생 어찌 살 거요?
그건 스님이 알아 무엇에 쓰시려고?
스님은 참 운외지치(韻外之致)하시고 미외지지(味外之旨)하시네요.
한 마디로 재수 없다는 뜻이죠?
<사공도司空圖(837-908)는 득저기(得諸己)에서, 자기한테서 얻는다, 했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직치(直致)의 방법, 방편으로 한다 했다. 얻은 바를 곧이곧대로 내놓고 풍격으로 절로 기묘하게 되는 것. 直致所得, 以格自奇, 절름거리나 떫게 끌고 나가. 蹇澁致才라 한다.
수행자의 목표는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열반의 길을 원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선禪이란 운외지치(韻外之致, 운자 이외의 운치)와 미외지지(味外之旨, 맛 이외의 것, 이라는 뜻)다, 란 말이 나온다..
수행은 원래 말이 아니라, 생활에 의해 드러난다. 우리가 산다는 건 수행이다. 밖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우리는 그렇게 산다. 그렇게 선禪에는 멋과 맛이 있다. 때가 되면 밥먹고 때가 되면 일어나 일하고 때가 되면 잔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언젠가 파계사 뒤, 성전암에서 철웅스님을 만나뵌 적 있다. 노사가 불향상이란, 꿈과 희망을 뛰어넘는 것이요, 훌쩍 저 산을 건너가는 것이라 했다. 그땐 그 말을 몰랐다.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 역력하게 드러나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보고 행동하는 거. 더 보태고 뺄 것도 없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모습대로 사는 거, 걸림도 막힘도 없는 그게 사는 거고 수행이고 禪이라 했다.
누구나 자연인이 되기는 쉽지만 자유인이 되기는 어렵다.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만, 있는 그대로 살기는 어렵다. 현실에 안주해 사는 건 수행이 아니라는 거다.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때는 가슴이 아릿해지고 답답하기만 했다. <높고 높은 산 봉우리에 서서 깊고 깊은 바다 속을 가라.>라는 말로 노사는 나를 더 미궁 속으로 몰아 넣었다.
누구나 자유인이 되기는 쉽지만 집착과 분별이 없는 자유인이 되기는 어렵다.
옳은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좋은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집착할만 한 가치는 없다 높은 곳, 꼭대기로 오르려는 사람들. 분별, 차별이 없으면 삶은 늘 여여해 깨달음은 부족하지 않을 것을.
철웅스님이 내게 물었다.
무엇으로 가는 가?
일심으로 가려 합니다.
스님이 내게 손바닥을 펴서 다시 물었다.
몇 개인가?
손가락은 다섯 개 입니다.
그러더니 주먹을 쥐어 보여주셨다.
주먹은 몇 개인가?
그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랬다. 나는 그때, 산을 내려오며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독에 담겨 있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아쉬워 했다. 그렇듯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 쥐 잡듯, 얼음을 밟고 강을 건너듯, 불붙은 머리의 불을 끄듯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
우리는 참으로 먼 곳에서 왔다.
먼 곳은 멀다는 것 만으로도 꿈만 같고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는 먼 곳으로 갈 것이다.
그 무엇에 나는 그리 쫓기며 살아왔던가.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던가(不得不知). 꿈 같고 허깨비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방울 같고 또한 번개와 같은 것을. 산곡, 곳곳에 쌓인 눈이 녹고 봄 햇살의 언어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불향상(佛向上)이거늘, 하다 하늘로 내리는 눈부신 햇살을 한참 바라본다. 분별하고 집착하고 살아왔던 날들.
훌쩍 저 산을 건너갈 때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제 남은 생은 나도 운치(韻致)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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