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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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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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이선이
무릎을 접어 그늘을 앉히고
뒤를 살피는 이 있다
가슴께로 눈을 낮추고
심장에 귀를 감춘 채
눈으로 듣고
귀로 다독이는 이 있다
등 돌려 떠나간 자들
등 내밀며 돌아올 때까지
등을 줍는 사람이 있다
주저앉은 삶에 골몰하느라
오래 앉았다 일어서면
절 받는 마음이
절하는 마음에게 다녀오느라
접었다 펴지는
그늘이 있다
-약력 :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서 우는 마음』, 평론집 『생명과 서정』,『상상의 열림과 떨림』 등이 있음.
# 이선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 모든 인연으로 생긴 건 공(空)하다는 마음을 떠올린다. 한 편의 시가 전해주는 생명의 진동이리라.
좋은 시. 울림과 떨림을 주는 시의 그 매력은 아마 시인과 독자의 그 이미지의 부딪침, 마주함, 그 서사의 충돌지점 때문일 것이다.
空이라 해도 空한 것을
내가 앉았던 의자는 그 어떤 의자였을까, 훤히 경치가 내려다 보이고 그늘진 곳에 놓인 의자였을까. 앞으로 앉을 의자는?
좋은 시가 갖는 특징은 시에도 볼 거리가 있다는 거다. 그렇듯 얘깃거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는 생각, 마음하게 하는 것이다. 그중 나는 그렇게 만법과 교감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하게 하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
불가에서는 만남과 나눔을 수희라 한다. 여기서 만남이란, 천지만물, 그 어떤 인연이라 하기도 하지만 인물과 사물, 사건, 사고와의 부딪침, 그 경계와의 마주함, 그 충돌을 의미한다.
살다보면 기쁜 날도, 힘든 날도, 즐거운 날도, 슬픈 날도 있다. 생노병사 우비고뇌 애오욕, 사람살이 고단하고 힘들어 의자에 털썩 앉는 경우도 있고 찻집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을 설레이며 기다리느라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회의를 하느라 둥글게 둘러 앉아 있을 수도 있다. 또 학생이 되어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려고 의자에 앉는 경우도 있다.
푸른 빛이 도는 창 밖으로 하늘이 어둡다. 내가 이 산으로 왔을 때, 제일 먼저 심은 나랑 의자를 같이 한 느티나무 하나가 머리를 어두운 하늘에 파묻고 있다.
쌓여있는 등을 맞대고 기대고 앉아있는 의자들을 한참 본다. 찢어지고 멍들고 터진, 색바랜 의자들.
이제 법당 앞에 매화와 목련은 지고 라일락과 사과나무 꽃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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