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관에서 바라본 평양 상공 ⓒ유성문(2004)

차원이 어떻게 상승하는지 아는가. 매우 간단한 원리다. 낮은 차원에 직각을 그리면 높은 차원으로 이동한다. 1차원에 직각을 더하면 그것이 2차원이다. 2차원에 직각을 더한 것이 3차원이고, 4차원은 당연히 3차원에 직각을 더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들의 이론적 논증의 범주로 공이 넘어가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 논증을 이해한다 해도 우리는 4차원을 실감하기 어렵다. 3차원에 어떻게 직각을 그려 넣을 수 있는지, 시각을 포함한 우리의 지각 경험이 뒷받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이렇게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 사실을 대개 잊고 지낸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계속 잊고 지낼 수 있는 인생을 우리는 흔히 ‘상팔자’라고 부른다.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그리고 자주 체험하는 삶은 고달프다. 이런 점에서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고달픈 팔자다. 우리 사회의 긴장 지수가 외국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이유도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 날, 남포

2004년 6월 25일. 날은 개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아침부터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한반도의 북쪽 산하를 참관했던 우리에게 ‘6.25’라는 숫자는 새삼스럽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었다.

평양 시내에서는 소위 ‘조국해방전쟁 기념 궐기대회’가 열린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참관단의 이날 일정이 그 행사와 직접 마주치지 않게 안배된 것은 아마 북측의 배려인 듯했다. 하지만 누가 내 욕을 하면 귀가 가렵다고 하지 않는가. 결코 우호적일 수 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을 그 시간, 그 말들이 우리 일행을 겨냥했을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말들이 온전히 우리와 무관하다고 뱃속 편하게 생각키도 어려웠다.

평양제2인민병원 ⓒ유성문(2004)

첫 번째 방문지인 정성제약을 거쳐서 찾아간 평양제2인민병원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1959년에 지어진 이 병원은 겉으로만 봐서는 건립 당시의 상황에서 조금도 변화가 없는 듯했다. 1959년이라면 내가 태어나던 무렵이다. 그런데 시간이 이곳에서만 훨씬 느리게 움직였다는 말인가.

왜 이곳에서,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듯한 느낌이 그렇게 강하게 엄습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가난하던 어린 시절 헤어졌다가 몇 십 년 만에 만난 형제가 옛날의 슬프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라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 마주친 나의 감각은 지나치게 높은 긴장 지수에 시달려 고달프다며 하소연한다. 우리 민족의 팔자는 왜 이런가.

특히 소아과 병동의 아이들은 그냥 ‘아픈’ 아이들이 아니었다. 서울에도 아픈 아이들은 많다. 하지만 2004년 6월 평양제2인민병원의 아이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어쩌면 아픔에 더하여,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픈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고통을 겪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분노를 요구한다.

아픈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애처로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 그리고 또 그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 일행. 그때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그 아이들의 볼을 어루만지고, 손을 꼭 잡아주는 일뿐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얘기한다. 나의 행동은 함께 울어주지조차 못하는 자의 자괴감의 표현이었으리라.

남포육아원의 아이들 ⓒ유성문(2004)

그러한 자괴감은 굿네이버스 산하 겨레사랑선교회의 지원으로 개축과 신축을 하게 된 평양육아원과 남포육아원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상대적으로 나은 평양보다 남포(우리의 인천쯤에 해당)의 아이들의 형편은 좀 더 우려스러웠다. 비록 극단적인 상태는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통일보다 더욱 시급한 교류와 지원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설령 머지않아 어떤 형태로든 통일이 된다 해도 현재 우리가 외면한 어린 생명들의 문제는 그대로 우리의 부채로 돌아와 계산서를 들이밀게 된다. 발육기의 영양부족은 나중에 심각한 신체적 정서적 장애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국 모두가 우리의 사회적 비용 지출을 요구하는 과제로 고스란히 돌아오게 될 것이다.

지금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결코 자선이 아니다. 당연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사회적 비용과 달리 그 효과가 가시적이지 않고 아직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비용 지출을 거부한다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사태가 생기게 된다.

심적으로 고단했던 공식 일정을 마치고, 평양 만경대 소년학생궁전에서 북한 어린이들의 공연을 바라보면서 나의 마음은 더욱 어둑해져갔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과연 우리의 미래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희망으로 이어질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공연 구경과 자신만의 상념을 오가며 나는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몽롱한 심리상태에 젖어들고 있었다.

평양 옥류관에서 ⓒ유성문(2004)

넷째 날, 귀환

이번 방북 일행 가운데 울산 문치과의원의 문백섭 원장 부부는 단연 화제의 대상이었다. 문 원장은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 22살 터울의 규수를 맞아 방북 전 해에 결혼했다. 그것도 초혼이었다. 몇 차례 방북 경험이 있는 그는 안면이 있는 북측 인사들에게 아내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이야, 이 친구의 젖니를 빼준 사람이거든….”

나로서는 그 부부의 로맨스 자체보다 22년이라고 하는, 거의 한 세대를 뛰어넘는 연령 차이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남녘땅에서는 요즘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그만큼 사회적 변화가 격심하고, 세대와 세대 간의 간극이 심각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기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간극이 어찌 세대와 세대 사이에만 있으랴. 세대 차이가 농담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문제가 덜 심각하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세대차를 둘러싼 농담은 우리에게 작은 희망일 수도 있다. 문 원장 내외는 그러한 희망의 살아있는 표본은 아닐까.

평양 순안공항 ⓒ유성문(2004)

문 원장 내외가 연령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을지가 궁금했다.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세대의 차이를 우습게 뛰어넘는 공통점, 일종의 공감대가 존재했기 때문에 부부로서의 결합이 가능했을 것이다. 혹시 문 원장이 방북 기간 내내 기회 있을 때마다 끄집어내던 ‘교집합’이란 개념에 그 해답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문 원장은 남북 관계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교집합의 원칙’을 강조했다. 거창한 주제를 놓고 서로 대립 갈등하고 입씨름을 벌이면서 힘을 빼고 석연치 않은 감정을 키우는 것보다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일지라도 남과 북 양쪽에서 현실적으로 합의할 수 있고, 이해 가능한 부분부터 접점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 원장의 발언은 서로의 차이점을 내세우기보다 적으나마 공통점부터 찾아나가자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은 시간적 차이보다 훨씬 더 복잡할 수도 있는 공간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나 오랜 전통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정서에는 분명 ‘부정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심성이 깔려 있다.

왜 우리는 강점보다 약점에 치중하게 되었을까. 확실한 것은 이것이 공격적이라기보다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태도라는 점이다. 자신을 어떤 공간에 가두고, 남들이 거기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우리를 지금 짓누르는 것은 무엇인가.

순안공항 상공에서 ⓒ유성문(2004)

벼룩은 자기 몸의 100배를 점프한다고 한다. 그런 벼룩을 그릇에 넣어두고 뚜껑을 덮으면 벼룩은 계속 ‘맨 뚜껑에 헤딩’을 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면 벼룩은 결국 충돌을 포기하게 된다. ‘알아서 기게(뛰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벼룩을 풀어놓아도 그 뚜껑 높이 이상 점프하지 않는다.

북녘으로 출발하던 날 새벽에 김선일의 죽음이 알려졌지만 나는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고, 방북기간 동안 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을 상상조차 못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집어든 남쪽 일간지에서 비로소 그 소식을 접했다. 남녘땅의 한 가난한 소년은 고등학교 교육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결국 대학에 갔고, 선교의 비전을 품었고, 머나먼 살육의 땅으로 갔다. 그리고 살해되었다.

공교롭게도 김선일의 시신과 방북대표단은 같은 날짜,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어수선한 공항 분위기 속에서 나를 엄습하는 무력감은 근본적으로 추락의 느낌이었다. 결코 분단의 상황과 무관할 수 없는 그의 죽음은 당연히 나의 추락감과 동질일 수밖에 없었다. 김선일은 점프했다가 부딪혀 목이 잘렸고, 나는 점프했다가 헤딩하고 추락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뛰어야 벼룩’이다. ‘뛰어봤자 벼룩’이 아니라, 어떻게든 계속 뛰어야 벼룩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뛰어야 벼룩’이다. 설혹 머리 위 장애물이 없어져도 당분간 우리는 그동안 주어졌던 높이 이상은 점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와야 하고, 점프해야만 한다. 우리가 제대로 뛰어오를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세대와 달리 머릿속에 알아서 기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세대가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