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십몇 년 전 가을이었던가. 나는 어느 허름한 시골역 플랫폼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 그 역에는 기차가 드나들었다. 기차의 미덕은 순전히 기다림에 있다. 그러나 화순 귀퉁이 남평역에서 기차는 기다리지 않아도 왔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파란색으로 바뀌고, 잠시 땡땡거리고, 이윽고 기차는 밀려와 섰지만 내리는 이도 타야 할 이도 없었다. 멋쩍은 기차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모르는 척 가을들판의 누런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뒤를 실없는 여운이 발을 질질 끌며 따라가고. 한 역무원만이 떠나가는 기차를 배웅했다.
역무원 정동진 씨(그는 아무래도 근무 역을 잘못 골랐다)는 측백나무 아래서 괜히 숨을 한 번 길게 고른 후 역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평역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어간다. 25년이 넘는 철도원 생활 중 숱한 역들을 거쳤고, 이제 어떤 역이든 나름의 분위기를 잽싸게 몸에 붙일 정도는 되었지만, 갈수록 적요해져가는 시골 간이역이 주는 정회는 또 다른 애틋함으로 다가오곤 했다. 젊을 적에야 대처의 번지르르한 역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호젓한 시골역들이 마치 안식처 정도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평역이 그래도 세간에 제법 알려진 것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그 시를 모티브로 한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 덕분이었다.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지 문학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역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남평역은 ‘사평역’의 모델로서 일약 간이역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1일 평균 이용객이 5명도 채 되지 않고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단 한 명의 손님조차 없는 이 역은 가끔 관련 기사의 취재원이 되기도 하고 드라마의 무대가 되기도 하면서 승객 수보다 더 많은 탐방객을 맞기도 했다.
시인이 <사평역에서>를 쓴 해가 1980년이라고 하니 어쩌면 동진 씨의 철도원 이력과 그 맥을 같이할지도 모른다. 그해 동진 씨는 군에서 제대했으나 한동안 방황해야만 했다. ‘80년 서울의 봄’은 광주에서 무더기 낙화로 지고, 세상은 어수선하고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던 그는 호구의 일환으로 철도공무원이 되었다. 동진 씨는 알고 있을까. <사평역에서>가 그 무참한 ‘80년 봄’을 지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때에 세상에 나온 시라는 것을. ‘남평역’과 ‘사평역’의 유사성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미 ‘사평역’과 ‘남평역’은 그의 이력 속에서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 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 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 기차를 기다린다/ 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 길 위가 편안하리라 –김수영 <간이역> 중에서
기차가 지나가고, 바람이 들녘을 덮어오자 아직 베이지 못한 벼들이 한쪽으로 쓸려 눕는다. 남평역에서 앵남역으로 가는 길은 부질없는 선을 넘어 활처럼 휘어든다. 앵남역은 나주를 벗어나 화순을 만나는 길목, 광주에서 도곡온천으로 가는 길목에 맨몸을 드러내놓고 누워 있다. 말이 역이지 건널목과 승강장, 안내판 덜렁 하나가 그 전부다. 거기에 키 작고 늙은 측백나무 한 그루가 가로등보다 더 긴 그림자와 신호등보다 더 짙은 시그널을 보낸다. 게다가 앵남역은 2006년 말로 그 보잘 것 없는 임무조차 끝내고 마침내 퇴역했다. 건널목을 지키는 마지막 간수 조영근 씨 역시 2005년에 남평역에서 퇴역한 전직 역무원이다.
앵남역은 역사도 플랫폼도 없지만 한동안 버젓한 역이었다. 소위 ‘을종대매소’로서 발권수수료 10%를 받는 주민이 운영하는 사설역이기는 했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하루 100명이 넘게 이용하는, 그래도 제법 짭짤한 간이역이었던 앵남역은 가깝게는 남평장이 서는 남평역이거나 화순장이 서는 화순역, 멀게는 남광주시장을 보러 나가는 근동의 아지매들이 몰려들었다. 남평역과 마찬가지로 남광주역이 폐쇄되면서 앵남역도 아연 활기를 잃었다. 보따리를 이고 장을 보러 가는 할머니들의 발길도 잦아드는 판이었고, 근처의 전남학숙 학생들을 제하고는 그 많던 통학생도 이미 찾아보기 어려운 터였다.
‘5·18항쟁 유적지’의 하나로 어느덧 멀끔하게 탈바꿈한 화순역을 지나 화순장으로 간다. 노끈으로 엉성하게 묶은 약초들과 텃밭에서 금방 따온 듯한 푸성귀들을 ‘폴러’ 나온 아지매들이 닭장 안의 닭들보다 먼저 졸고 있다. ‘참새방앗간’에는 곡식을 찧으러 나온 게 아니라 근질한 입방아를 찧기 위해 모여든 늙은 참새들로 가득하다. 애저 한 점에 막걸리를 거나하게 들이킨 촌로의 풀어진 눈매무새가 왠지 싸하다. 그 초라한 왁자지껄함에 등을 떠밀려 시장 밖으로 나선다. 어디로 가야 할까. 경전선은 화순역을 지나자마자 능주 쪽으로 이미 몸을 틀어버렸고, 겨우 남은 화순선은 퇴락한 화순광업소 앞에 아예 멈춰버렸다.
동면을 지나 남면으로 내려가면 ‘사평역’ 없는 사평이 나온다. 하지만 ‘사평역’ 없는 사평이 훨씬 ‘사평역’답다. 사평에는 역 대신 오래된 버스정류장이 허름하게 서 있고,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서면 개천가에 낡은 장옥들이 함석지붕을 맞배로 늘어뜨린 채 줄지어 서 있다. 예전에 다리 아래로 더러운 화장실이 있었고, 그 앞에 풀빵을 파는 점포가 있었고, 시장을 사이에 끼고 풀빵집 맞은편에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 아래 ‘똥갈보’들이 술을 파는 색싯집이 있었다 한다.
다시 눈을 돌리면 다슬기 그득했던 개천 너머로 새로 선 양조장 건물이 보이고, 그 근처는 보나마나 오래된 다슬기집들이다. 동네사진관의 유리창 안에는 낡은 젊음이 흑백으로 웃고 있다. 사평에는 역이 없으므로 당연히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는다. 설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움으로 오는 것이며, 이내 그리움만 남긴 채 떠나버린다.
청년은 무릎을 굽혀 바께스 안에서 톱밥 한줌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의 불빛 속에 가만히 뿌려 넣어본다. 흐르르르. 삐비꽃이 피어나듯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져들고 만다. 청년은 그 짧은 순간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어머니다. 어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임철우 <사평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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