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로 접어들면서 산천을 지배하던 빛들은 시들고 마음마저 허허로워진다. 충남의 끝자락과 전북의 들머리를 이루는 대둔산에서 시작하여 완주의 화암사와 경천저수지, 신월마을을 들러 운일암·반일암에 이르는 길은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케 해주는 고졸(古拙)한 길이다. 곳곳에 미처 따지 못했거나 까치밥으로 남겨져 있는 감들은 그 허허로운 풍경에 마지막 붉은 점을 찍는다.
그렇다. 자연의 모든 숨결마저 잦아든 것처럼 보이지만, 감의 붉은 기운이 곶감 속에 스며들어 대단원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완성을 준비해 가는 것이다. 마침내 눈이 내려 대지를 따뜻하게 덮으면 소생에의 기다림 역시 더욱 깊어져만 가리라.
젊은 날에 올랐던 대둔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위벼랑을 겨우 붙잡고 힘들게 올라야 했던 길도 그렇지만 정상에서 만나는 출렁다리가 주는 아찔함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대둔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순식간에 오를 수 있는 곳이 되었고, 케이블카의 천정 창으로 다가오는 대둔산의 정상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산행의 고달픔이 사라지면서 정상이 주는 짜릿함도 사라졌다. 다만 발밑으로 펼쳐지는 조망만은 여전해서 길을 잃어버린 아쉬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대둔산을 내려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그리움으로 남겨져 있던 화암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화암사 들머리인 구재마을을 막 지나치는데 특이한 복장의 촌로가 눈에 들어왔다. 수술이 달린 검정색 모자와 한복 위에 걸쳐 입은 빨간 조끼가 너무 선명하기만 했다. 더구나 그 빨간 조끼에는 연유를 알 수 없는 태극 마크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의 표정에서는 단호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촌로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화암사 가는 길이신가? 잘 다녀오시게.”
불명산 화암사는 그 깊이의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절이다. 아무리 깊은 외로움으로도 이 절의 속내를 풀어낼 길이 없다. 끊긴 듯 이어지는 벼랑길에서 시작하여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절간에 이르기까지 길을 찾는 이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을 뿐이다.
<화암사중창기>에는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이라 하였지만 이미 그런 기록이 갖는 의미마저 빛이 바랜 지 오래다.
원래는 경천저수지 부근의 화산마을에서 붕어찜에 소주를 곁들여 적적한 심사를 달랠 생각이었는데, 화산마을에는 잘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더 내려가 고산에서 일박을 한 후 새벽녘에 서둘러 경천저수지 구경길에 나섰다. 간밤의 빗기 탓인지 저수지뿐만 아니라 인근의 마을들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포장도로를 버리고 저수지 곁을 바짝 따라붙고 있는 오솔길로 차를 몰아갔다.
작은 벼랑 옆으로 겨우 난 길의 끝에서 웬 할아버지 한 분이 낙엽을 쓸고 있었다. 인근에 민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은 그저 저수지를 도는 길일뿐이어서 신새벽에 그 길을 깨끗이 쓰는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묻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낚시터로도 유명한 경천저수지는 마치 바다처럼 드넓었다.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은 모노톤의 담백한 실루엣을 던져주고 있었다. 첫차로 온 물오리들이 그리는 물의 궤적은 한가로웠고, 수면 위로 잔가지들을 내밀고 있는 물버드나무들은 아직 잠이 덜 깨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길은 계속되었다.
경천저수지에서 시작하여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 순으로 큰 저수지를 옆에 끼고 시원스레 길을 가다보면 마침내 동상 곶감으로 유명한 신월마을에 닿는다. 이 길을 오는 동안 내내 감나무의 짙은 잔영이 동행했다.
호젓한 무덤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자작나무가 망자의 영혼을 담고 승천하고 있는데, 두 그루의 감나무는 마치 수호목처럼 무덤 곁을 지키고 있었고, 저수지 자락을 타고 들어선 감나무 몇 그루는 마지막 남은 붉은 빛을 호수에 잔잔하게 비춰보고 있었다. 마을 입구의 감나무 한 그루는 어찌나 키가 크던지 시골 교회의 십자가보다 높아 보이기까지 했다.
상강(霜降)을 지나면서 모든 잎들을 떨구어버린 감나무들은 가지의 짙은 음영과 굴곡을 드러내 보이면서 짐짓 자기가 무슨 영혼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지금 신월마을에는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온 곶감들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비록 찬란한 황금빛을 잃고 진홍으로 퇴색되어가는 중이지만 먼 길을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님처럼 조용히 분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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