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오직 사랑만을 위해 나는 죽으리
_양양 남대천 연어의 귀향
유성문 주간
승인
2021.10.28 09:00 | 최종 수정 2021.10.2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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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한낱 그리움일 뿐이어서
그 사랑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으리
그 많은 별빛과 그 많은 물살들
일일이 기억할 수조차 없나니
어느 구비에서 어느 사랑 때문에 상처입고
어느 어귀에서 어느 기억으로 헤매였던가
그래도 사랑은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어서
숱한 죽음의 골짜기 돌고 돌아
피 묻은 물둑 넘고 넘어
남은 힘 있다면
오직 사랑만을 위해 나는 죽으리
-졸시 <슬픈 귀거래>
남대천 연어의 귀향은 처절하다. 멀리 북태평양의 오호츠크해나 베링해를 떠돌던 네 살배기 쯤의 연어들은 수온이 강하하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제 태어난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연어의 회귀처 중에서 가장 먼 남쪽에 속한다는 한반도에 이르는 동안 숱한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지만 낮이면 태양으로, 밤이면 별빛으로 길을 잡아 쉼 없이 해류를 거슬러 오른다. 마침내 지치고 지친 몸으로 산란절식(産卵切食)의 굶주림과 민물의 삼투압을 이겨내며 모천(母川)을 오르는 동안에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상처에는 흰 물곰팡이가 피어난다.
가까스로 산란장에 이르면 이번에는 인간들이 쳐놓은 채포망이 앞을 가로막는다. 양양내수면연구소 직원들에게 포획된 연어들은 나무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즉사한다. 이어 암컷의 배를 갈라 알을 받아내고 수컷의 정액을 그 위에 뿌림으로서 인공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남대천 연어는 일생에 한번뿐인 짝짓기조차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연어를 통해 되돌아보는 인간의 삶’이란 연어축제의 캐치프레이즈는 차라리 진실에 가깝다.
고향에 돌아온 것은/ 오직 죽기 위해서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은/ 마지막 사랑을 위해서이다/ 저 아래 오십천은/ 50개의 계단이 만들어/ 그 물 거스르기를/ 50번이나 하면/ 태어난 물 냄새에 안길 수 있다/ 이곳 남대천도/ 내 기억을 살리면/ 70번도 넘게 치솟아 오르는 급류의 계단을 지나/ 그 폭포/ 그 격랑/ 그 완만한 물살을 지나야 했다 -고은 <머나먼 길>
하기는 어차피 내수면연구소의 채포망이 아니더라도 이제 연어가 남대천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곳곳에 ‘보’와 ‘둑’이라는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어도(魚道)를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그 계단은 턱없이 높기만 하고 힘을 뭉그릴 웅덩이가 없으니 뛰어오를 수도 없다.
부질없기는 하지만 끝내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는 연어들을 대신하여 남대천을 거슬러 올라보자. 오대산 두루봉에서 발원한 남대천은 부연동, 법수치, 어성전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간다. 51km에 이르는 남대천은 연어의 고향이자 양양의 젖줄이다. 그 맑은 물줄기로 이제껏 물것들을 품어주고, 산으로 스미어 올라서는 온갖 뭍것들을 키워냈다.
남대천 상류로 오르는 길목인 내현리에는 아직도 사람의 온기가 식지 않은 굴피집 한 채가 남아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이용구 씨는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자식들을 키워내며 한평생을 살아왔다. 이제 다 자란 자식들은 제 살길을 찾아 도회로 떠났고, 남은 노부부마저 가까이 새 집을 지어 옮겼지만 아직 외양간에 자식과 다름없는 소가 살고 있고, 집안 곳곳에 묻은 손때 역시 너무도 여실하여 그 집에 대한 기억과 애착마저 쉬 지우지는 못한다.
온갖 물고기가 득시글하다는 어성전(漁城田)에서 잠시 하조대쪽으로 길을 바꾸면, 연어가 돌아오기 이전까지 송이 향 그윽하던 명지리가 나온다. 전국 생산량의 80% 정도를 차지한다는 양양에서도 명지리는 으뜸가는 송이 산지이다. 마치 연어 꼭 모천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송이 또한 나던 곳에서만 난다. 이처럼 남대천 자락의 모든 것들은 가을이 깊어갈수록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다. 우리네 삶 역시 그러할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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