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남은 온기를 위하여

_겨울 횡성

유성문 주간 승인 2022.02.03 11:07 의견 0

풍수원성당 ⓒ유성문(2008)

바람 끝에서 나는 몇 번이나 넘어졌던가/ 일으켜 세울 이 없어 마음은 시리고/ 빈 길에서 봄은 너무 아득하다/ 눈을 밟으면 낡은 풍금 소리/ 따라오던 새들조차 비키어 날아가고/ 눈물의 끝에서 나는 하늘을 본다/ 그대여, 빈 하늘을 본다// 아직 남은 언덕이 있다면/ 가야 할 길이 있다면/ 나는 또 몇 번이나 넘어져야 하는가/ 시린 겨울의 끝에서 바람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졸시 <풍수원성당에서>

횡성의 풍수원성당은 지은 지 100년이 된, 한국인 신부에 의해서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초기 박해를 피해 풍수원으로 숨어들어온 ‘천주학쟁이’들은 숯과 토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규하 신부의 지휘 아래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총 건립비 6000원. 이때 무슨 생각에서인지 거금 1500원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찾아와 ‘내 돈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다. 보다 못한 정신부가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면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하고 꽁무니를 빼고. 그러다 다시 술에 취하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공사장으로 올라왔으니, 그 허튼 실랑이를 지켜보던 신도들은 웃음으로써 공사판의 노고를 씻어버렸다.

온기1_참숯가마

겨울 횡성의 바람은 날카롭다. 가로세로 이리저리 후리다 크게 한번 베면 오래 묵은 참나무조차 쿵 하고 쓰러질 듯하다. 모진 치악의 북쪽, 새말나들목을 빠져나와 후치악 안흥 방향으로 5분 남짓, 전재라는 고개를 넘는 굽잇길이 나온다. 예전에는 버스 한 대가 지나기에도 비좁은 비포장도로였지만, 지금은 제법 번듯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잠시 고갯마루에 서서 내려다보면 산비탈로 영문 모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비탈을 내려가는 작은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생각지도 않았던 가마터가 나온다. 경원참숯. 아직도 재래식 숯가마에서 전통방법으로 숯을 구워내고 있는 곳이다.

가마터 안에는 군데군데 참나무가 더미로 쌓여 있고, 낡은 목재운반용 ‘제무시(GMC) 딸따리’ 차량도 한 대 서 있다. 눈을 이고 있는 지붕 처마 끝으로 고드름이 가지런한데, 10여 기의 가마 안에서는 참나무의 다비식이 한창이다. 가마 안의 불길은 맹렬하고, 그 맹렬함만큼이나 불꽃은 고혹적이다. 스스로 태워본 적이 있는가. 그 무엇을 향해 그토록 맹렬하게 불타올라본 적이 있는가. 숯은 섭씨 1500~2000도의 고온 속에서 익어가고, 마침내 소신공양을 마치고 무쇠보다 단단한 진신사리로 남는다. 그 사리의 내부는 고통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무수한 구멍을 가진 숯 1g의 내부 표면적은 무려 300㎡로 테니스장만하다. 그 구멍은 유해균과 악취를 빨아들이고 원적외선과 음이온을 내뱉는다. 그러나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리 없는 사람들은 그 잉걸불 곁에서 다만 한겨울의 추위를 잠시 피해간다.

경원참숯 박영환 ⓒ유성문(2008)

경원참숯 대표 박영환 씨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숯과 인연으로 한평생 살아왔다. 경북 의성에 뿌리를 두었지만 강원 영월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산판에서 일을 하며 잔뼈가 굵었다. 배운 게 없으니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숯가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베는 현장 곁에 구덩이를 파고 임시 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냈다. 가을부터 산에 올라 움막을 짓고 숯을 굽다 보면 계절이 지나는 것도 예사였다. 추운 겨울이면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짐차로 눈 덮인 산을 미끄럼질 쳐 내려와야만 했다. 그 고단함을 누가 알까. 그러나 그 고된 일을 통해서 얻는 수입이라곤 입에 풀칠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영월의 탄광으로 들어갔다. 숯 굽는 일보다 수입은 나았지만 고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탄광의 석탄가루들은 숯과는 달리 사람의 폐부를 찌들게 했다. 6년의 광부생활 동안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견디다 못한 그는 집에서 취미 삼아 기르던 벌통 3개를 들고 무작정 공기 좋은 곳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스며든 곳이 바로 지금의 횡성이었다. 한때 벌통이 50개로 늘어나는 등 잘 나갔지만, 어느 해인가 병이 돌자 벌들이 ‘싸그리’ 죽어버렸다. 메기나 송어를 양식하고, 매운탕집도 해봤다. 한동안 장사가 잘되는 듯도 했으나, 그 또한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문을 닫아야만 했다. 농사일에다 미장일, 벽돌공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는, 마치 무슨 운명인양 어느 날 다시 숯가마로 돌아왔다.

한때 숯의 효능이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퍼져나가면서 숯가마가 덩달아 붐을 타기도 했다. 숯가마찜질이 유행하자 그 역시 찜질방을 짓고 ‘삼초구이’(부삽에 삼겹살 등을 얹고 딱 3초 동안 가마 안에 넣었다가 꺼내 먹는 것)도 개발했다. 그는 숯의 효능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그것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10년 전 뜨거운 숯가마에서 일을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두 번의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말문이 막히고 몸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포기상태에서 빈 가마 하나에 바닥 가득 숯을 깔고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문이 다시 트이고 몸도 제대로 돌아왔다. 숯가마의 유행이 시들면서 벌이는 다시 시원치 않지만, 그래도 그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 딸은 시집을 보냈고, 2대독자인 아들은 대학을 마치고 아버지 일을 잇겠다며 스스로 숯가마에 매달렸다. 그것이 대견한 것인지 안쓰러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들 어려운 세상에 일할 수 있는 터전이라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고통을 이겨내고 질 좋은 백탄으로 태어난 참숯을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선하다.

온기2_찐빵마을

내친김에 잔재의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안흥이다. 이 마을 역시 겨울 산골짜기에서 뜬금없는 훈김을 모락모락 피워낸다. 그 훈김의 주인공은 바로 찐빵이다. 인구 3000명의 그리 크지 않은 면 소재지 시골마을에 찐빵집만 20곳도 넘는다. 그것도 한때 30곳이 넘다가 줄어든 숫자란다. 아무리 ‘안흥찐빵’이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심지어 도로변 리어카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전국구 브랜드’라고는 하지만, 이 많은 찐빵집이 다 어떻게 먹고 사는지 은근히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전국 각지에서 팔리는 안흥찐빵의 상당수가 이름만 내걸었을 뿐이지 기실은 안흥산이 아니라니까 말이다. 그 많은 찐빵집이 다 ‘원조’니 ‘전통’이니 ‘본가’니 ‘옛날’이니 하며 내력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척 보기에도 문을 연 지 몇 년 되지 않은 집이 여럿인 것 같고, 몇몇 집을 빼고는 장사가 썩 잘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어쨌든 좋다. 쓸데없는 걱정에 아랑곳없이 그래도 장사가 되니까 문을 열고 있는 것이고, 먹고살기 힘든 시골마을에서 이만한 장삿거리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안흥찐빵 심순녀 ⓒ유성문(2008)

정작 안흥찐빵의 원조라는 심순녀 씨의 찐빵집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비록 마을로 들어가는 들머리라고는 하지만, 보통 원조집을 중심으로 ‘촌’을 형성하는 관례와는 달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심순녀 안흥찐빵의 경우는 조금 의아해 보였다. 그녀가 찐빵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40년째를 맞고 있지만, 지금의 자리로 옮긴 지는 몇 해 되지 않는다. 원래 면사무소 앞에서 장사를 시작했던 탓에 현재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집을 원조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고, 또 실제로 더 많은 손님을 끌 때도 있다.

그리 된 데에는 그녀의 어려웠던 과거와 무관치 않다. 열아홉 나이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벌이도 시원찮은 남편을 대신해 장사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제 가게를 갖기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를 들어 가게를 하다 보니 말 못할 속사정도 생겨나는 법이었다. 그녀의 찐빵이 어느 날 갑자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찐빵집을 차리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녀는 원래의 가게와 새 가게를 오가며 불가피하게 두 집 장사를 해야만 했다. 그에 얽힌 사연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녀는 1999년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안흥찐빵은 전국적인 브랜드가 되었고, 타 지역에 분점도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분점이라 하더라도 재료와 기술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안흥찐빵은 다 같다는 말에 은근히 질색까지 하는 눈치다. 거기에는 자기만의 노력으로 고유의 맛을 지켜온 외곬과 함께, 힘든 세상을 살아오면서 은연중 몸에 배인 어떤 자기방어의식 같은 것이 스며있는 듯도 보였다.

그러나 빵 맛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 것인가. 그녀 역시 한결 같은 자세로 정성스레 빚는 것을 그 첫째 비결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가난했던 삶이, 그 역경을 헤쳐 온 삶의 이력이 그녀의 찐빵 맛을 결정짓는 진정한 비결일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찐빵은 가난한 시절 허기를 채우던 음식이기에 추억이야말로 찐빵의 진짜 앙꼬이며, 따뜻할 때 나눠 먹는 맛이 제 맛인 것이다.

겨울 횡성은 산도 가로 가고 강도 가로 가고 사람도 가로 간다. 바람도 가로 가고 길조차 가로 간다. 혹독한 추위와 신산한 삶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곳곳에 따스한 온기가 숨어 있는 것조차 어쩌지는 못한다. 그 온기를 안고 가는 마음조차 어쩌지는 못한다. 소한 대한 추위를 지나며 땅도 물도 다 얼어붙은 듯 보이지만, 그 밑으로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분명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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