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31일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 ‘서태지와 아이들’ 긴급 기자회견.
신년 벽두에 각 언론사의 가요담당 기자들에게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뭔가 묵직한 뉴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각사 기자들은 바삐 움직였다. 지금의 BTS가 갑자기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게 당시 분위기였다.
가요담당 기자뿐 아니라 사회부 기자들까지 기자회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즈음에 ‘서태지가 조직폭력배로부터 협박당했다’라는 식의 뜬소문도 있었기에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장식할 중요 뉴스가 기다리고 있을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이날 현장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가 일방적으로 기자회견문을 읽고 질의응답도 없이 표표히 사라져갔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주었다”라면서 “오늘부터 ‘서태지와 이이들’은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부산 김해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할 거라는 예상을 깬 행보였다.
그날 현장에서의 에피소드도 있다. 갑자기 현장에 투입된 사회부 기자가 가요담당 기자들에게 물었다. “서태지는 알겠는데 그 뒤에 말 한마디 않고 서 있던 두 사람은 누구죠?” 누군가가 “아이들”이라고 대답해줬다. 이 사회부 기자는 더 헷갈렸을 것이다. 많은 기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렇게 떠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서태지의 표현대로라면 그들도 이제 원로가수(?)가 된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우선 그들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MBC 예능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로 무대를 펼쳤다. 작곡가 하광훈, 작사가 양인자, 연예기자 출신 MC 이상벽, 가수 전영록 등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이들의 무대를 평했다. 결과는 10점 만점에 7.8점. 너무나 박한 점수였다. 그러나 당시 심사위원들도 뭔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움을 느꼈다. 모국어로 된 랩이 혼란스러웠고, 그들이 보여준 춤도 생소했지만 강한 개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이어 본격적인 팬덤의 등장을 불러왔다. 단순한 팬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팬덤이 그들을 호위했다. 주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지만 단순히 박수부대에 머물던 예전의 팬클럽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의 힘으로 서태지는 하루아침에 대중음악계를 점령했다. 당시 방송사 프로듀서나 대중음악담당 기자, 음악평론가 중에서 그들의 혁명을 점쳤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인정한 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가리켜 ‘문화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문화를 사랑하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주변의 대변인이나 누구 써준 각본에 의한 것이 아닌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나온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30년. 서태지는 바로 어제로 느껴지는 그때 혼자서 문화혁명을 일으킨 전사였다, ‘난 알아요’를 시작으로 경쟁으로 얼룩진 교실의 풍경을 비판한 ‘교실 이데아’(1994),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발해를 꿈꾸며’(1994), 청소년 문제를 지적한 ‘컴백 홈’(1995)까지 어느 곡 하나 새롭지 않은 곡이 없었다. 국악인 김덕수의 태평소 연주를 차용한 ‘하여가’는 얼마나 신선했던가.
이후 서태지의 행보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누구든 잘 알고 있다. 솔로 데뷔 이후에도 창작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실제로 불합리한 제도가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전 국민을 경악케 한 일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BTS를 앞세운 K-POP의 전성기를 맞게 된 맨 앞에 ‘서태지와 이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파격과 실험,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몸짓이 있었기에 누구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K-컬처가 봇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다른 여느 아빠처럼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일상을 즐기고 있는 서태지에게 새삼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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