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어설프다’와 ‘야무지다’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2.06.10 09:00 | 최종 수정 2022.06.10 15:47 의견 0

요즘 나는 많이 어설퍼졌다. ‘야무지다’는 경남 쪽 방언으로 알고 있다. 야물딱지다? 야물다 쯤 되겠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스님아, 좀 야무지게 매조져 봐라.”

어릴 적 경남 쪽에 고향을 둔 자연농 선배스님이 계셨는데 항상 처음과 끝을 강조하셨다. ‘매조지다’는 ‘끝을 단단히 단속하여 마무리하다’란 뜻이다. 나는 농사를 그 스님에게 배웠다.

비록 텃밭농사지만 봄이 되면 그 스님의 말이 새록새록 기억나곤 했다.

“행복은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다.”

뿌린다, 씨앗을 땅에 심는다는 건 거둘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대상에 대한 지각이라는 거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장하던 스님이었다.

그리고 뿌려만 놓으면 끝이 아니라는 거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는 것이다. 올해 나는 고추심기가 늦어졌다. 초파일이 끝나고서야 고추를 심었다. 그리고 엄청 가물었다. 늦게 심은 데다 퇴비만 쓰고 비료를 쓰지 않아 고추들의 생육이 나처럼 비실비실했다.

“자주 들여다본다는 건, 대상으로서의 실천이다. 수행이라는 게 그런 기다.”

“……”

깨달음, 진리, 수행 또한 마찬가지라는 거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던 적이 있다.

사진 | 유성문 주간

고라니가 심어 놓은 고추모종 대가리를 똑똑 따먹었다.

“야, 보리. 너 뭐하는 놈이냐?”

내가 진도견 믹스 보리에게 직무태만에 대해 따져 물었다.

“나눠 먹고 살아요.”

목소리가 높은 내 모습을 보고 보리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며 군시렁댔다. 하는 수 없었다. 다시 모종 가게로 나가 시들시들한 모종을 뽑아내고 새로 심었는데 아, 글쎄 고라니들이 맛있다고 또 따먹었다.

입맛을 쩝 다셨다. 그랬다. 고구마를 심어놓으면 멧돼지가 와서 난리법석을 피워놓고 간다거나 고추를 심어놓으면 고라니들이 꼭 나의 일상을 따분하게 그냥 두지 않았다.

“응, 그래? 그럼 나도…” 하며 그물을 사다 막고 세 번째 고추모종을 심었다.

“뿌린다고 뿌린 만큼 다 거두는 법은 없다. 얽매이지 말고 홀가분하게….”

용하게 살아남은 모종들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스님은 고라니 막는 그물막까지 쳐가며….”

보리가 욕심 부리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양 꿍얼댄다. 그래서 내가 보리에게 “야물딱지게 매조질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어”라고 말했더니 “어리석은 이는 물질이 풍요로워도 부족해도 괴로워하고, 지혜로운 이는 항상 부족해도 지족해 하고 행복해 한데요” 한다.

“아쭈구리, 이눔아. 깨치기 전의 닦음이란 원래 불완전한 거야.”

그렇게 보리에게 퉁방을 주는 나는 과연 가을에 얼마나 거둘까. 하하허망 우습도다. 오늘 아침 되돌아보니 무심객(無心客)이 되라는 고추, 고라니, 보리가 나의 거룩한 스승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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