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로 세상읽기】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의 역사와 사회-2

김위영 산업번역 크리덴셜 대표 승인 2022.07.04 00:13 | 최종 수정 2022.07.04 01:00 의견 0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런던대학교 교수의 <Under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조상의 눈 아래서;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 2015)>는 직접 안동 의성김씨 내앞 집성촌을 수차례 방문하여 조선의 종족제도, 유교적 질서, 제사의례, 향약과 서원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다. 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Odd Arne Westad(오드 아르네 베스타드, 1960~ )는 <Restless Empire(잠 못 이루는 제국, 2012)>를 통해 18세기와 19세기 중국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한중관계 600년사를 다룬 <Empire and Righteous Nations(제국과 의로운 민족, 2021)>를 통해서는 한국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들 저서를 통해 몇 가지 주제를 정리해본다.

족보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적 자산이다

_<Under Ancestor’s Eyes(조상의 눈 아래서)>

하버드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는 조선의 족보를 거의 모두 수거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연후에 2014년에 문과 급제자 1만4천 명을 분석하며 이들의 친인척 등 10만 명에 대한 출생년도, 사망년도, 친가와 처가의 기록, 급제자의 자, 호, 본관, 거주지 등을 찾아내 조선시대 지배엘리트 인명록인 <보주조선문과방목(補註朝鮮文科榜目, 2014)>을 만들어냈다. 족보의 문화적 가치가 대외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Confucian enunciation of linearity and pedigree as well as vivid consciousness of the power and prestige ancient ancestry imparted on a kin group heightened interest in reconstructing ancestral genealogies — an enterprise that, by calling for the cooperation of all kinsmen, was to deepen their sense of unity and commonality. --P205

직계와 혈통에 대한 유교적 언명과 친족집단에 부여된 선조의 권세와 위세에 대한 선명한 의식은 족보의 재구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족보를 편찬하는 사업은 모든 친척의 협력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일체감과 동질성을 심화시켰다.

By 1600, the Confucian principle of agnation was not yet uniformly in operation, but, inculcated through ritual practice, it provided the impetus for the growth of the patrilineal lineage system that in the following century came to maturation and underpinned the life and prestige of the localized sajok elite of late Choson. --P207

1600년경에 이르러서도 유교적 종법이 획일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의례적 실천을 통해 주입된 원리는 부계종족제도의 성장에 동력을 제공했고, 다음 세기에 이 제도는 성숙되어 조선 후기의 지방 사족(士族)의 생활과 위세를 뒷받침했다.

A concomitant of lineage formation was the documentation of descent from a common patrilineal ancestor in a written genealogy. In an increasingly competitive political and economic environment, the tracing of the ancestral past evolved into a determination of an elite lineage’s identity and self-representation. --P297

종족 형성에 부수적인 것은 공동부계 조상으로부터 출계(出系)를 문서화된 족보로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는 정치적 및 경제적 환경 속에서 조상의 과거를 추적하는 것은 엘리트종족의 정체성과 자기재현방식의 결정으로 진화했다.

The creation of a collective memory of in the form of genealogical records was a stimulus as well as an elaboration of lineage organization, as impressively illustrated by the prefaces to the consecutive edition of the genealogy of the Uisong Kim, the Uisong-Kim-ssi-sebo. According to the preface of 1553, written by Hwang Chul-lyang, it was a nonagnate, Yi Suk, who first collected data on agnatic and nonagnatic(nae-oe) descendants of the Uisong Kim in a booklet. But before these records could be carved into woodblocks, they were scattered during the Imjin War. --P297

족보상의 기록이라는 형식에 의한 집단적 기억의 창출은 의성김씨 족보인 <의성김씨세보>의 연속된 개정본 서문들에 인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듯이 종족조직에 의해 추진된 정교화작업이자 자극이었다. 황준랑이 1553년에 쓴 서문에 의하면 의성김씨의 남친계과 비남친계(내외손)에 관한 자료를 한 권의 책자로 수집한 사람은 비남친계인 이숙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목판에 새겨지기 전 임진왜란 중에 흩어졌다.

The reasoned decision to make Sok the apical ancestor of the Uisong Kim highlights the fact that the choice of a sijo was in many cases a rather than late phenomenon. A genealogy was, after all, a cultural invention motivated by the ambition not only to establish an unbroken patrilineal descent line back to an ancestor of prestigious origin but also to include as many acknowledged kinsmen as possible. --P298

김석(金錫)을 의성김씨 시조로 만든 이유 있는 결정은 시조의 선택이 오히려 늦은 현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족보란 결국 명망 높은 시조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부계 출계를 확립하는 동시에, 인정되는 많은 친척을 포함시키려는 야심에서 비롯된 문화적 발명이었다.

Genealogy records as they evolved over time and combined ancestral depth with unprecedented comprehensiveness in the eighteenth century not only legitimated an individual’s elite status. By making status maintenance a collective enterprise, they also show how lineage membership in the late Choson came to be underpinned by a far-flung kin network that promoted cohesion and facilitated cooperation far beyond village borders. --P299

세월이 지나며 진화되고 18세기에 전례가 없는 포괄성으로 조상 연원의 깊이를 결합한 족보의 기록은 단지 개인의 엘리트 신분을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신분 유지를 집단적인 사업으로 만듦으로써, 족보 기록은 조선 후기에 종중 성원권이 어떤 식으로 광범위한 친족연결망—마을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어 친족의 유대를 촉진하고 협력을 촉진한—에 의해 뒷받침되었는지를 보여준다.

Although genealogies—the earliest of which date from the fifteenth century—of the historically prominent(and sometimes nor-so-prominent) Korean descent groups invariably depict an unbroken line of high office holders from the early Koryo on, the genealogies also tend to depict descent groups as single, direct lines of patrilineal descent during the Koryo, which subdivided into several branch lines only after the rise of the Choson. --John B. Duncan, The Origins of Choson Dynasty, P74

역사적으로 한국의 주요 가문(때로는 그렇게 저명하지 않은)의 족보—가장 빠른 것은 15세기부터 시작된다—들은 고려 전기의 고위관리부터 끊어지지 않는 계보를 언제나 묘사하였으며, 족보는 또한 고려시대에는 부계 후손의 단일한 직계로 가문을 묘사하다가 조선 건국 후에야 몇 개의 지파(支派)로 다시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 --존 던컨 <조선왕조의 기원> 중에서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국가를 지킨 것은 의(義)와 지식 때문이었다

_<Empire and Righteous Nations(제국과 의로운 민족)>

중국제국의 주변국가인 티베트, 몽고,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과 중국 남서부지역의 여러 나라가 중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중국에 편입되지 않았다. 여러 원인이 있으나 가장 큰 요인은 한국의 정체성과 지식이라고 베스타드 교수는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엘리트들은 중국이 아는 것보다 제국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였다. 중국에 간 사신은 정보를 수집하여 조정에 보고했으며, 중국에서 새 제안이 올 때마다 유교적 경전을 바탕으로 대응방안을 세웠다.

China was at the center of cultural, economic, and political exchanges for Korea as it was for most of the eastern Asian region. But its ability to dominate Korea had been tenuous at best, and often nonexistent, right up to the establishment of the Ming empire in China in 1368. --P8

중국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문화·경제·정치교류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368년에 명나라의 건국 이전까지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미약했고 종종 존재하지 않았다.

“Serving the Great” was a way of protecting Korea from Ming interference and from external enemies. But it was also a way of giving significance to the Choson regime by portraying it as a uniquely close associate of the most powerful state around. --P 36

사대(事大)는 명나라의 간섭과 다른 외적에서 한반도를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대는 조선정권이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중국과 친밀한, 독특한 이웃국가임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The older brother should protect and enlighten the younger, represent him toward others, and treat him with care and forgiveness. Together the brothers should conserve and extend the family’s wealth, prestige, and position. This relationship was, at least in form, continued through the Ming and Qing eras, and right up to the late nineteenth century. --P42

형은 동생을 보호하고 계몽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동생을 대변하고, 그리고 동생에게 관심과 용서로 대해야 했다. 형제들은 함께 가족의 부와 명예, 지위를 보존하고 확장해야 했다. 중국-한반도의 형제적 관계는 적어도 형식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거쳐 19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The Ming had shown their greatness by saving Choson from Japan, and that none but Koreans could be trusted to uphold the interests of the state and the country.

The two lessons could easily go together as long as the relative significance of each was calibrated according to the situation Korea at any time found in itself,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P56

명나라는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해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조정과 나라의 이익을 수호했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교훈은 각자의 중요성이 조선이 언제나 국내외적으로 맞닥뜨린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배합된다면 쉽게 갈 수 있는 것이었다.

The price Korea paid for autonomy and ideological cohesion was, in many ways, a self-contained society, which was more cut off from the rest of region than it had ever been before. --P64

조선이 자치와 이념적 응집력을 위해 지불한 대가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의 다른 지역과 단절된 스스로 봉쇄한 사회였다.

There are many reasons Korea was never incorporated into the empire. One is what might be termed complex sovereignty. Unlike in the European Westphalian system, Asian empires and states have long recognized that total sovereignty for any country is a chimera. --P162

한반도가 제국에 한 번도 편입되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의 이유는 복합주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식 베스트팔렌 체제와 달리 아시아 제국과 국가는 오래전부터 모든 국가의 완전한 주권의 평등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는 분들이 많다보니 수많은 한국 관련 저서가 산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다룬 제임스 팔레의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a(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 1991)>, 현대사를 다룬 한국전쟁의 대가 브루스 커밍스의 <Korea‘s Place in the Sun(한국현대사, 2005)>와 미국 언론인 돈 오버도의 <The Two Koreas(두 개의 한국, 2014)>,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연구한 앙드레 슈미드의 <Korea Between Empires(제국 사이의 한국, 2007)>, 토드 헨리의 <Assimilating Seoul(일본에 동화하는 서울, 2014)>은 꼭 접해볼만한 원서들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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