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2.08.23 09:00 | 최종 수정 2022.08.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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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울퉁불퉁하다. 보리는 까불까불 앞서 걷다가 나란히 걷다 보이지 않다가 기다렸다가 내가 보이면 또 다른 오늘로 살랑살랑 간다.
그러다 멈추었다. 순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뭔가를 보았다는 얘기다. 뱀인가? 뱀이라면 사납게 노려보았다가 순간 콱 물어 좌우로 냅다 흔들어댈 것이고, 개구리라면 점프 안 해도 되는데 붕 뛰었다가 콱 물 것이다.
나의 부름에 폭우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소나무들이 눈을 끔벅거리고 참나무가 웅얼거리고 풀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보리야. 나는 미연에 살생을 방지하기 위해 보리를 부른다. 왜유? 바쁜데유 하는 눈빛으로 보리가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바람에 푸른 어둠은 걷히고.
비 그치고 해가 반짝 뜬 날, 산중은 매미들 천국이다. 숲속에 차곡차곡 앉은 채 파노라마를 펼친다. 어쩜 새벽부터 지치지도 않는지. 나는 아직도 꿈과 욕망이 남아 해골을 든 채 산보를 한다. 풀잎들의 향기가 진하다. 그새 보리의 목표물은 사라지고 다시 까불거리며 앞서 간다.
오호라, 들국화 꽃 피우려고 망울졌다. 보리가 여기서 큼큼거리고 저기서 큼큼거려도 오늘은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게 없어서 좋다.
실핏줄 퍼지듯 햇살이 떠오른다. 개울가에 흰 두루미 우리를 보고 퍼뜩 날아오른다. 물이 불은 개울물, 급류로 흐른다. 밤새 흘러갔겠지.
비탈진 계곡에 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아득한 낭떠러지로 향해 가는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쌓인다.
풍경에서 빠져나오니 다시 매미가 왁다글거린다. 헐렁한 바지를 입고 어슬렁어슬렁, 마치 나의 장례를 집행하는 양. 이제 나는 빠르지 못하다. 가볍게 한숨짓는 이유는 점점 폐활량이 줄어드는 까닭인가 보다.
작년까지만 해도 산책길에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 내가 보리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보리가 나를 끌고 다닌다. 시간이 되면 방 앞에 앉아 산보 가자고 내가 나올 때까지 낑낑대는 거였다. 그리하여 절룩거리는 나는 참 순한 짐승이 되었다.
돌아보니 약을 주지 않은 고추밭은 망했다. 오십 근은 넘게 땄었는데, 수십 년 고추 심었는데 고추밭 고추 병든 건 처음이다. 방문 앞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나 몰라라 어디론가 사라진 보리가 없는 절마당을 한참 본다.
마루에 걸터앉으니 다시 매미소리 소란스럽다. 산수유, 노랗던 생강꽃 봄인가 했는데, 들국화 산의 늑골아래 꽃망울 졌다. 점심나절에 국수 삶아준다고 수양딸이 올라온다 했는데, 아무래도 곡차, 작은 놈 막걸리나 한 통 사오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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