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하고 보통인간인 내가 좋다. 새벽이 되면 나는 지난밤 흉몽에서 벗어 나와 가슴을 말리러 나간다. 밤의 내장들을 꺼내 시냇물에 흔들어 씼으러 간다. 걸림도 없어라, 막힘도 없어라. 바람에 실려 오는 이 푸른 새벽향기를 어이 그냥 보내리.
어떤 아이는 태어나고 또 어떤 누군가는 죽어가는 이 새벽, 하늘이 열리고 산이 열리는 것이다. 그 열림의 미학 속에 있으면 왠지 뿌듯해진다. 밤새 달빛 아래 별빛 아래 헤맨 내 정신들, 새벽공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하늘이 땅이 내게 빛으로 마음을 열어 우주에 두루하라 한다. 날더러 새로운 날을 맞이하라 한다.
어둠속이면 나는 지독한 침묵에 잠겨 있다 아침 산책을 할 때가 되어서야 살맛이 난다. 걸을 수 있을 만큼 여명이 밝아올 때야 나는 즐겁다. 룰루랄라. 노을이 긴 치마자락을 끌고 동녘으로 기어오를 때, 그런 때, 산보는 나보다 진도견 믹스인 보리가 더 좋아한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가 뛴다더니, 폴짝폴짝 뛰는 보리는 도통 고민이 없다. 그래도 가끔은 사는 게 너무 권태스럽고 지루한 모양이다.
새벽노을을 받으며 앞서가던 보리가 길을 멈추고 나를 본다. 사랑이 죄고, 살아있는 게 죄고, 고독이 죄지, 내가 한숨을 쉴 때 그때의 보리의 얼굴을 보면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근심을 품고 살 이유가 없잖아요, 하고 올려다보는 거 같다. 하루는 보리에게 물었다. 너는 왜 아침 산책하는 걸 좋아하니? 내부에 있던 나를 외부와 비교해 보는 거예요. 저녁 산책도 좋아해요.
발아래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죽었는데 검은 개미들이 디글디글 모여 있다. 내가 그걸 한참 내려다보자 개구리는 죽었는데 개미들은 신이 났네, 한다. 그러네? 하고 쳐다보자, 보리가 쟤네들도 수행하는 거예요, 한다.
그런데 저도 문제는 있어요, 한다. 어쭈구리. 그런데 재밌다. 그래 무슨 문제? 흥미로운 눈으로 보리를 본다. 오늘 잉크빛 메꽃은 보았는데 분홍빛은 보지 못했어요. 난 하양색도 보았는데. 걷다보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개가 되고 싶은데 막막하기만 할 뿐 그게 잘 안 되네요. 그래 니놈 개 주제에 생각을 바꿔서 뭘 할 건데? 문제 없는 인간도 없듯, 너도 문제 있는 견이라는 걸 알기만 해도 절밥 먹은 개라는 걸 인정해 줄게, 하자 보리가 뚱하게 나를 쳐다본다. 저는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라고요, 한다.
그러다 뭘 또 그리 오물락 쪼물락 사세요? 그래도 살았으니 또 꾸물거려봐야지, 그런데 그건 니가 알아서 뭐하려고? 보리랑 대화를 하며 걷는다. 걷다 걷다 보면 매 일 매 시간 다른 소재, 배경, 다른 주제의 사물과 대상을 만나곤 한다.
논에는 벼꽃이 피었다. 벼들이 당신이 왔다간 오늘, 또 하루를 미쁘게 살아요, 하는 거 같다. 나는 그래, 하며 올해도 풍년이 들었음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보리가 풍년이 들면 뭐해, 쌀농사 지어봤자, 겨우 본전을 넘기는데요, 한다. 그래. 네놈이 바로 견자(見者)다, 라며 나는 눈을 씀벅거린다. 산보는 그렇게 늘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감동을 준다.
걸으며 자연이 주는 서사로 중얼거리기도 흥얼거리기도 하는데 산책은 경직된 몸과 젖은 마음을 말려주는 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 끝없는 삶의 탐색과 도전정신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이걸 포행이라 하기도 하고 만행이라 하기도 한다.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행선(行禪)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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