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창포길 통신】 예비 성범죄자가 된 아침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10.16 09:00 의견 0

아침 산책길. 저 앞에 여자 아이 하나가 나풀나풀 걸어간다. 초등학교 1학년쯤 됐을까? 어깨에 건 가방이 앙증맞다.

끝내 견고할 것 같던 평화는 내 둔탁한 발자국 소리에 순식간에 깨지고 만다. 아이가 살짝 돌아서서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외로 꼰다. 그리고 담장에 바짝 붙어 서서 ‘이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언뜻 마주친 눈동자에는 공포에 가까운 불안이 그득하다.

공포의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걸음을 빨리하면서도 나는 억울하다. 지금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저 남자’는 날마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무서운 그놈’일 것이다. 마음 좋은 이웃집 아저씨가 몽땅 사라진 세상을 잠재적 성범죄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상쾌하던 마음에 납덩이 하나가 얹힌다. 시인 정호승은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형상을 눈부처라 노래했거늘, 저 아이의 눈에서 누가 부처를 빼앗아 간 것일까.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는 어린 딸에게 엄마는 국민교육헌장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했을 것이다.

“낯선 아저씨는 무조건 피해야 돼. 이웃집 오빠도 조심해야 돼. 경비 아저씨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마”

요즘 세상, 딸 가진 엄마의 기본 교육 목록일 것이다. 험한 세상에 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엄마라도 그랬을 것 같다. 날마다 따라다니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꿈이 되어야 할 동네 오빠, ‘안전하게 모셔야’할 택시 기사, 지구의 마지막 날에도 살만한 세상을 가르쳐 할 학교선생님까지 범죄자가 되는 현실. 모기 한 마리 잡는 것도 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99.9%의 동네 오빠와 택시 기사, 경비아저씨, 선생님들의 억울함은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하나.


“야, 이년아. 거시기 달린 사내놈들은 몽땅 도둑놈들이여, 늑대라구. 저년이 삶은 호박마냥 물러 터져 가지구…‘

자신의 경험을 금과옥조로 삼아 딸을 훈계하던 엄마의 날들은 그나마 낭만이 강물처럼 흐르던 시절이었다. 그 옛날의 도둑놈과 늑대들은 모두 예비 강간범이나 살인범이 되어 거리를 활보한다.

속상한 것은, 나까지 아이의 눈에 위험한 존재로 비쳤다는 게 아니다. 이 아이들의 앞날이 두려운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성범죄자라는 터무니없는 등식이 뼈마다 각인될까봐 걱정인 것이다. 예비 성범죄자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예비 강간범과 이웃에 살고, 예비 성폭력범이 모는 택시를 타고, 예비 성범죄자가 지키는 아파트에 살고 예비 성추행범이 가르치는 학교에 딸을 보내고…·. 그런 생각에 갇힌다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일까?

세금 걷어가는 나라가 해결하지 못하니,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에게 ‘성범죄 예방백신’이라도 개발하라고 촉구해야 하나? 이 아침, 한숨 하나가 하늘의 무게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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