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창포길 통신】 아내의 눈물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10.07 09:00 의견 0

며칠, 세상의 오지를 떠돌다 돌아왔다. 허리 굽은 소나무에게 길을 묻고, 산과 강을 뒤져 세월이 묻어둔 이야기를 캐내는 일은 평생을 반복해도 쉽지 않다. 드디어 겨울시즌이 시작됐다. 난 늘 그렇듯 시간을 한 계절쯤 앞질러 살아야 한다.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면서 책 한 권 만들어 납품하는 일은 행복하면서도 고단하다. 오늘 늦게 돌아올 일정이었지만 비가 장하게 올 거라는 예보에 어제 부지런히 길을 줄였다.

모처럼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잔 놓고 빗소리에 귀를 적시고 있는데, 전화기에 아내의 이름이 떴다.

“응!”

으레 하는 안부 전화려니 했는데, 목소리가 좀 축축하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스스로 토닥거린다. 별일 있으려고. 비 탓이겠지?

“……지금 비 오잖아.”

“응! 무슨 일 있어? 지붕이 새나?”

아파트 지붕이 샐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달래기 위해 짐짓 농으로 말을 연다. 아내는 한참 대답이 없다. 대답 대신 긴 한숨이 들려온다. 다시 한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잠시 뒤 대답 대신 흐느낌이 들려온다.

“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흑흑! 그게 아니라, 비가 오잖아. 비가 오는데, 창밖을 보니 너무 슬픈 거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뭐야!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워낙 잘 울기도 하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의 눈물에는 나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어디 보통 풍경인가? 오늘은 집 창문 그림틀에 비구름을 쓴 북한산이 걸려 있겠구나. 자연은 하루도 같은 그림을 걸어놓는 법이 없었다. 계절별로 날짜별로, 혹은 날씨에 따라 가슴 설레는 새 그림을 걸어놓고는 했다. 나와 아내의 자랑이자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스무날쯤 뒤에는 그 집을 비워주고 떠나야 한다. 1994년 지금 사는 동네로 들어왔으니 30년이 다 됐고, 7~8년쯤 다른 집에서 살다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으니 한 집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묻어 있는 집인지.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슬픔 속에 밤을 지새웠다. 그 집을 떠나려니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 하필, 비가 올 건 뭐람.

그곳에 있지 않아도 머리에는 비에 젖은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그래, 지금쯤 참 아름답겠구나. 아직은 내 이름으로 된 집이지만 아득한 과거, 혹은 아득히 먼 나라에 살았던 집처럼 멀기만 하다. 아내는 흐느낌과 하소연을 반쯤 섞어 옛일을 이야기한다. 집을 떠나는 아쉬움이 절절하다.

“참 좋은 집이었는데, 창밖만 바라봐도 행복했는데…. 저기에는 머루가 묻혀있고… 오늘은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나네. 나가 봐야는데, 꼼짝 못 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

“그러게. 참 좋은 집이었지. 내가 오죽하면 사람들에게 풍경만 따지면 최소 15억짜리 집이라고 자랑했을까. 참 오래도 살았네.”

머루는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할 무렵 기르던 강아지 이름이다. 지금은 서른이 다 된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때 우리 집으로 왔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가족은 여전히 그 아이와 살던 때의 이야기를 한다. 내 시집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에도 등장하는 강아지다.

그리움의 실체

머루는 오래 전 함께 살던 강아지다

눈이 머루알을 닮았던 아이였다

발치에서 잠들고 깨기를 천 날쯤 하더니

누가 부른 걸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서둘러 세상을 떴다

산비탈 나무 아래 식은 몸 묻던 날은 비가 내렸다

이천 날쯤 지나 그곳에 가봤는데

비탈의 나무들 하나같이 한쪽으로 굽어 있었다

직립을 버리고 등뼈 꺾는 고통을 택한 것들이

축축한 눈으로 내 집 창에 흐르는 불빛을 보고 있었다

비라도 내리면 나무마다 멍멍 짖을 것 같아

서둘러 돌아서는 걸음 앞 풀섶에

전에 없던 길 하나 희미하게 숨어있었다

아내의 젖은 목소리는 길게 이어지고, 나는 1000년 쯤의 시간을 가진 부자 남편처럼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단을 맞춘다. 세상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이곳 파주의 변두리 동네에도, 아내가 사는 서울의 변두리 북한산 자락에도… 그니와 내 가슴에 내리는 비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어서, 바람으로 떠돌다가도 어느 곳에선가 다시 만나 그날이 오늘인 듯 울 수 있겠지. 빗속에 눈물 한방울 묻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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