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11.18 09:00
의견
0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존재로부터 훌쩍 도망치고 싶을 만큼 우울한 날이었다. 서너 시간째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여덟 시쯤 울음기를 꾸역꾸역 삼키는 게 역력한 한 사내가 전화를 했다. 처음 보는 번호,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경기도 별내에 산다고 했다.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불행했던 출생과 불우했던 성장과정을 이야기했다. 어머니 아버지를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눈물나게 고맙고 절실하게 그립다고 했다. 보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사내는 나보다 훨씬 슬픈 사람이었다. 나는 여전히 본 것만 그리워한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한탄했지만, 나는 그 해법을 이야기 해줄 능력이 없었다.
대화는 길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문장은 몇 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정확한 멘트는 아니다.
“죽으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선생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일으켜 세웁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선생님 글 때문에 웁니다.”
“미안합니다. 누굴 울리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선생님 덕에 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그를 내가 머무는 공간으로 초대한다고 말했고, 전화는 오래지 않아 끊겼다. 전화가 끊어진 뒤 혼자 자꾸 되뇌었다. 내가 당신을 살게 하는 게 아니라 당신 같은 사람들이 나를 살게 한다고. 숨고 싶은 날에도 기어이 글 한 줄 쓰게 한다고. 다시 술잔을 채우면서 내일도 글 한 줄 쓰기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사는 건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나누는 품앗이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