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창포길 통신】 아내의 집들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11.11 09:00 | 최종 수정 2022.11.11 10:30 의견 0

영하의 날씨지만 하늘은 맑다. 농익은 햇살이 고봉으로 퍼 담은 쌀밥처럼 푸짐하다. 이렇게 마음 부른 날은 창문 앞의 고양이처럼 나른해진다. 좋은 징조다. 짐을 싸기 전에 다시 한번 메모를 살핀다.

호박/감자/찧은마늘/다시팩2/파/돼지갈비/된장/알타리김치/소주(내가 마실 것)… 건화 신발/빨아둔 옷/헐크 후크(못 대신 벽에 부착하는 것)/자전거 펌프…

싸야 할 짐이 많다. 오늘은 아내가 집들이하는 날이다. 살던 집 팔아 빚을 끄고 남은 돈으로 며칠 전 인천광역시 모처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했다. 이제 서울 사람 아니다. 굳이 ‘아내의 집들이’라고 하는 이유는, 가장인 나는 전입신고만 하고 작업실에 계속 머물기 때문이다. 그 집에는 아내와 작은아이와 늙은 강아지 차돌이가 입주했다. 그리고 오늘 온 가족이 모여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죽전에 사는 큰아들 내외와 손자, 그리고 파주에 사는 나, 아내가 모이는 날이다. 작은아이는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없다.

관심은 없겠지만 아이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면, 길었던 취준생 생활 끝에, 내 작업실에 와 있는 동안 원하던 업종의 회사에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여 첫 출근을 시켰는데, 첫날부터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일요일도 출근한다. 공부를 한다고는 했지만 몸은 편하게 지내던 아이로는 아마 죽을 맛일 것이다. 세상 뜨거운 맛을 초장에 다 보는 셈이다.

회사가 마침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기 때문이라나? 녀석이 들어가서 일이 많아진 게 아니라 일이 많으니 신입사원을 뽑았겠지. 할 일이 많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려나? 아이가 내 작업실에 머문 기간은 일주일 남짓인데, 구석구석 두고 간 건 왜 그리 많은지. 수색 끝에 옷이니 뭐니 찾아서 빨고 개어서 오늘 들고 간다. 여친이 선물했다는 화분을 레옹의 마틸다처럼 들고 왔는데, 그건 내가 압수하기로 했다. 쯧!!! 또 이야기가 논두렁으로 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아내의 집들이에 왜 내가 호박에 파까지 준비하느냐고? 언젠가부터 가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든 주방은 내 몫이 되었다. 솥단지도 칼도 도마도, 심지어 냉장고까지도 내 손을 더 반긴다. 대체 이게 뭐야!! 사실은 자청한 면이 크다. 우리 집에서 음식 맛을 가장 잘 내는 게 나기 때문이다.

심사 및 판정은 며느리가 했다. 이 아이는 내가 만든 음식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먹는다. 된장찌개만 해줘도 가성비 만점이란다. 그러니 음식 품목도 내가 정하고 재료도 내가 준비하고, 만드는 것도 내가 해야 한다. 엊그제 마트를 뒤진 이유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어휴! 이런 말 닭살인가? 김정수 이런 멘트 날릴 때 닭살 돋은 이유를 이제 알겠네.)

오늘도 정성껏 집들이 음식을 만들 것이다. 둘러앉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나눠 먹을 것이다. 이번 생의 내 마지막 날을 전셋집에 맞으면 어떤가. 그보다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 빈손으로 온 주제에 그 이상 바라면 죄를 짓는 것이다. 시 열심히 쓰고 마음 편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지. 누구에게 신세 안 지고 아이들 걱정 안 시키고 떠나면 최고의 생이지. 그깟 빚 좀 털었다고 삶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지갑이 개털 돼야 마음이 부자 되는 이치를 이제야 알겠다.

이젠 정말 최소한으로 벌고 최소한으로 쓰고(이슬만 먹고 사는 법을 연구 중이다. 참이슬 말고), 아프지만 말아야지. 세상에서 조금씩 이름을 지우고, 어느 날인가 가뭇없이 사라져야지.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거나(왜 이 꿈은 자꾸 멀어지지?) 책상 앞에 앉아 뭔가 쓰다가 불현듯 숨을 거두는 게 유일하게 남은 소망이다.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둔다. 에구! 얼른 준비하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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