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창포길 통신】 가스요금 고지서를 받던 날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3.03.17 09:00 의견 0

매달 이맘때쯤 오는 게 있다. 오늘도 우편함에는 어김없이 올 게 와 있었다. '2023년 03월 도시가스 지로영수증'

가스요금 통지서다.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하던 것보다 더 설레는 순간이다. 지난달은 좀 더 춥게 살았으니 가스비도 내려갔겠지? 화투장 까는 노름꾼 사내의 심정으로 천천히 액수를 확인한다.

54,860원. 애개? 이게 뭐야? 지난 달 54,900원이었으니 고작 40원 절감했잖아? 이게 말이 돼? 얼마나 춥게 살았는데... 12월 2만 원대던 가스요금이 1월에 7만 원대로 올랐을 때 충격이 컸다. 절대액수의 문제보다는 숫자 노이로제였다. 그래서 긴급 월동대책을 세웠다. 가장 두꺼운 이불을 덮고 방에서도 등산양말을 신고 파카를 입고 글을 썼다. 그래서 2월에 2만 원을 절약했는데 이달에는 이 모양인 것이다.

50~60만 원대 난방비를 내는 누군가는 "5만 원이면 어떻고 7만 원이면 어때서... 참 쪼잔한 얘기를 다 쓴다"고 하겠지만, 이건 자존심 문제다. 난 오늘아침에도 아내에게 보약 지어 먹으라고 기십만 원을 송금한 통 큰 남자다. 내가 그러는 이유가 있다. 나는 전형적인 1인 가구다. 방 둘 중 하나와 주방은 아예 가스 밸브를 잠갔다. 그러고도 온도를 17도 낮춰놓고 살았다. 그렇게 노력했으면 뭔가 보람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말이다.


마침 아랫집 고지서도 같이 꽂혀 있었다. 다른 집들은 대체 얼마나 쓸까? 호기심에 슬쩍 들여다봤다. 201호도 혼자 산다. 헉! 이게 얼마냐? 2만 400... 뭐야, 이거! 왜 똑같은 집 아래 위층이고 똑같이 1인가구인데 나는 5만 원이고 이 사람은 2만 원인 것이냐? 도시가스공산지 어딘지 내가 좌빨이라고 차별하는 거 아냐? 내 당장 전화를 걸어서... 씩씩거리며 전화번호를 찾다가 다시 한번 아랫집 고지서에 쓰인 숫자를 세봤다. 일, 십, 백, 천, 만... 20만 4,900원. 엥? 이게 뭐야? 2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이라고? 이 콧구멍만한 공간에서 나보다 네 배나 썼다고? 왜애?

음화화하핫!! 계단을 올라오면서 크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얼마나 알뜰한 사람인데. 얼마나 열심히 겨울을 살아냈는데. 그러다가... 그러다가... 방에 들어와 거울을 보며 슬프게 운다. 이 친구도 늘그막에 참 비루하게 사는구나. 그깟 5만 원이면 어떻고 20만 원이면 어떻다고... 고작 가까이 사는 타인의 '불행'에 기대어 웃다니. 그래! 사실은 나 쪼잔하다. 엉엉~ 거울 속 친구여! 냉장고에 소주가 남았을까?

냉정한 놈.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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