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4.11 09:00 의견 0

그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시인은 시대의 슬픔과 고통의 근원에 대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했다. 내가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꼭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시인의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에서 보면.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바다는 전혀 다르다. 살아 있는 내가 죽어 있는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밖에 보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내 삶은 죽음을 억압하는 일―내 뚝심으로 죽음을 삶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넣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므로. 어느 날 죽음이 나비 날개보다 더 가벼운 내 등허리에 오래 녹슬지 않는 핀을 꽂으리라. 그래도 해변으로 나가는 어두운 날의 기쁨, 내 두 눈이 바닷게처럼 내 삶을 뜯어먹을지라도.”

"나의 생각을 바꾸거나 나 자신을 바꾸지 않는 한, 나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면? 너무 늦었다!"

“아, 그는 그토록 바보 같을 수가 없었네. 그는 세상에, 세상의 병을 전하지 않았네. 세상 전체가 그를 옭아매는 형틀이었네. 아, 누가 멍든 괴로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

"삶은 끊임없는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근본적으로 절망은 허위다. 살아있으면서,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것”

“절망은 ‘바닥 없음’으로서만 절망일 수 있다.”

“상처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지옥도 없다.”

“너도 참 외로운 존재로구나. 나도 그런데 말이야.”


문학을 하는 후배 스님이 왔고, 읽고 있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를 덮었는데.

"스님은 인제 이런 책 읽지 마세요."한다.

"뭐 인마?"

옛날 같았으면 '조까'했는데 몸살로 인마전마 했더니 꼬랑지를 내리고 도와주겠다며 밭으로 가잔다.

"혁명은 잘 되가고 있냐?"

"혁명은 커녕 옆에 있는 사람들만 괴롭혔어요."

하며 진작에 혁명을 때려치웠다며 밭일을 도와주었고, 다름이 아니오라 책 좀 빌려달라고 한다.

나는 내 책을 누구에게 결코 빌려주지 않는다. 책에 밑줄을 긋고 행간, 여백에 지랄 같은 나의 글들을 써놓곤 해서. 그걸 알면서도 그런다.

"조또스님은 스님의 허무를 저희들에게 희망으로 바꾸어주지 못하셨잖아요."

내 별명은 로또가 아니라 조또, 조또, 한다고 조또씨르발스님이었다.

"야, 인마. 네놈이 행복하기 위해 내 영혼까지 들먹일 이유는 없잖아."

"그래도 다들 기대를 했었어요."

순간 먼 길 찾아왔는데, 비싼 홍삼에 정관장까지 사가지고 왔는데 놈이 갈 때 줄 여비가 없다.

".....기대? 그랬구나. 그렇다면 조또 미안하다. 그러면 네가 그렇게 함 해봐. 나도 기대라는 걸 좀 해보게."

하며 '거마비 대신 조또라며' 허락했더니 김지하, 황지우, 이성복, 하종오, 박상륭, 현기영의 책들을 몽창 뽑아갔다.

돌려받지 못할 걸 빤히 안다. 책꽂이가 휑하다. 그동안 앓던 허무가 쑥 빠져나간 것 같다. 왜 이리 기분이 상쾌할까. 조또씨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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