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산이 좋아 산에서 산다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6.20 09:41 | 최종 수정 2023.06.20 16:22 의견 0

하안거다. 산에 살면 순정해진다. 산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 날마다 새롭고 자유롭게. 지난 추위를 견디고 두 떡잎, 싹을 튀우던 풀들은 어느새 연두, 초록을 지나 녹색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부론면의 손곡리 필봉(筆峰)아래 산다. 미륵산의 갈래줄기이다. 필봉(筆峰)이란 글씨 쓰는 붓의 모양을 닮았다 해서 그리 부른다. 풍수에서는 금체(金體)라 부르기도 한다. 산에 살면 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산을 내려와 내가 사는 산을 올려다보고 다짐하고 걷다가 강물이 깊게 흐르는 것도 내려다보고 다시 산을 기어오른다.

흔들흔들 걷다보면 흔하디 흔한 민들레, 씀바귀 , 제비꽃. 꽃마리, 냉이, 지친개 같은 봄풀들이 판을 치더니 이젠 하얀 개망초, 물봉숭화, 노란 애기똥풀, 산딸나무, 자귀나무 꽃들이 수려하게 피었다.

세상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나였다. 그러나 변화가 연속되는 삶이었다. 하지만 성격이 급해 빨리빨리 살았던 날들이었다. 또한 괴랄같아 끝장을 보고야 말았던 지라 내가 나를 볶아먹듯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유유자적하고 싶었는데 자급자족, 소욕지족이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열망과는 달리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지독한 현실에 붙잡혀 쫓기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한소식을 바랬건만.


그러나, 이제는 붙잡고 있던 걸 놓게 되었다. 한소식은 커녕 반소식도 못한 채 그저 한가하게 떠가는 구름이나 보고 살자. 그러자 말도 행동도 엄청 느려졌다. 넘어질까 부러질까, 조심조심하게 되고 무엇보다 새로운 일을 벌이려 하지 않는다. 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어제와 다름없었던 삶, 산속의 삶은 서두를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붙잡았던 골짜기들, 바윗돌들. 소나무들. 돌아보면 이젠 어지럼증과 허리협착증으로 저릿저릿해진다. 그래도 안목이 부족했던 젊은 날 그렇게 억척스레 굴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세상과 격절된 곳에서 비승비속으로 살았던 날들, 산은 내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숲의 나무도 풀도 돌멩이도 꽃도.

소나기가 새벽과 함께 개울로 흙탕물되어 흘러내려온다. 미륵하생의 지상의 낙원이 되는 날은 언제 올까. 이 생각 저생각 꼭 내 마음 속 같다. 아이고 너무 멀리 걸어갔다 온 거 같다. 쉬고 또 쉬어 저 애환의 흙탕물 개이면 콧구멍 귓구멍 막힌 쇠로 된 나무에도 꽃이 피려는지. 이번 안거 보내고 나면 나도 위풍당당하고 호쾌해 지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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