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창포길 통신】 선크림과 팔토시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3.07.28 09:52 | 최종 수정 2023.07.28 10:49 의견 0

이번 가족 모임은 순전히 며느리의 ‘강압적’ 소집이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의사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날짜와 장소, 그리고 뭘 먹을지까지 결정해서(그리고 준비해서) 통보하다시피 했다. 시아버지인 나, 시어머니인 아내, 남편인 큰아들, 시동생인 작은아들, 그리고 제 아들인 손자까지, 그녀의 지시 대로 입만 준비하면 됐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누구도 반항하지 않았다. 아! 불꽃처럼 타오르는 카리스마여!

모르는 척했지만, 내가 며느리의 깊은 속뜻을 모를 리 없다. 하루가 1년이라도 되는 줄 알고 쑥쑥 자라는 손자 때문이었다. 뒤집더니 기고 기더니 서고 서더니 걷고, 걷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뛰어다니는 새 생명. 자라는 아이는 자주 보지 않으면 남이나 다름없이 서먹해지기 마련이다. 그걸 아는 며느리가 마련한 자리였다. 저도 직장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데, 준비하고 움직이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래도 내 가족의 화합은 내가 지킨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구성원들이 모여, 내가 네 할아비란다. 내가 네 할미다. 내가 네 삼촌이야. 얼굴을 익히고 옹알이라도 나눠야 한다는 뜻이었을 게다.

아내가 사는 검단 집에서 펼쳐진 식사 겸 술자리는 ‘화기애애’의 교과서였다. 며느리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꽃갈비니 아롱사태니 과일이니, 작은아이가 따로 주문한 족발이니, 아내가 사 온 골뱅이무침은 슬슬 지쳐가는데, 새 술병은 부지런히 무대로 등장했다. 술을 많이 못 마시던 큰아들 술발이 직장생활 짬밥만큼 늘었고, 내 술발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작은아들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처럼 씩씩하게 마셔댔다. 아내는 여전히 술을 입에도 못 댔다.

특이한 건 며느리였다. 그 아이의 술발은 이 집안에서 나 다음으로 센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결혼 전 처음 인사하러 온 날, 내가 따라주는 술을 즉각즉각 원샷!!으로 해결해서 제 시어머니 될 사람을 반쯤 졸도시킨 전력이 있다. 그렇게 한 병쯤 거뜬히 치웠던가? 그러던 아이가 아이를 가진 뒤로 술을 안 마셨다. 출산하고 1년 반 이상 지났는데도 여전히 금주 상태다. 내가 “OO야!(며느리 이름 부른다고 흉보지 마시라) 아버지하고 모처럼 한잔 해야지?” 할 것 같으니까 약한 술을 사 오긴 하는데, 대부분은 딱 한 잔 받고 그친다. 그게 아이를 품은 어미의 마음이겠지? 며느리는 정말 손자를 잘 키운다. 내 능력으로 가능하다면 ‘노벨 육아상’이라도 땡겨 주고 싶다.

온갖 이야기가 오갔다. 말하는 시간보다는 웃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술자리에서는 절대 잔소리를 안 한다. ‘라떼’나 교훈 같은 것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가장의 몫만큼 대화를 끌어나가긴 하지만, 주제를 던져놓고 젊은이들의 말을 듣는 편이다. 대신 나를 자주 시중들어야 하는 술잔이 피곤해진다. 어쩌다 보니 나와 아내의 건강 이야기가 나왔고, 내가 아침마다 부지런히 운동하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하다 언뜻 옆을 보니 작은아이와 내 팔이 술잔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헉! 이게 뭐지? 작은아이의 희끄무레한 팔 옆에 있는 내 팔이 블랙에 가까운, 마시던 커피를 엎지른 듯한 갈색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어! 내 피부가 왜 이 모양이지?" 소리 지르고 말았다. 맹세코 내 팔이 그만큼 심하게 탄 줄 몰랐다. 혼자 사는 자의 비애였다. 며느리가 물었다.


“아버님! 운동하러 가실 때 선크림 안 바르세요?”

“응, 그걸 왜 해? 난 그 무엇도 바른 적이 없어. 얼굴에 스킨이나 크림도 안 발라. 샴푸도 안 쓰고.”

“그러시면 안 돼요. 팔토시는 하세요?”

“아니! 그런 걸 귀찮게.”

“그러지 말고 밖에 나가실 땐 꼭 하셔야 해요. 피부가 급격히 노화돼요.”

“그래? 귀찮은데… 그래도 네가 하라니 하지 뭐.”

그러다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우리는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놀았다. 다음 날 오전에 쓰린 속을 달래며 작업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려는데, 택배 꾸러미 하나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택배보다 보낸 사람의 마음이 먼저 와 있었다. 열어보니 선크림 하나와 팔토시 두 세트였다. 아! 손 빠른 며느리가 보냈구나. 내가 귀찮아서 안 바를까 봐, 선크림은 튜브형이 아닌 스틱형이었다. 세심하기도 하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주문한 모양이었다. 요즘 택배는 로켓을 타고 다닌다.

나도 선크림과 팔토시가 있다고, 커피색 피부를 우유색으로 바꿀 수 있다고 자랑하려고 긴 글을 썼다. 세상의 착한 며느리들과 팔이 새까맣게 탄 시아버지들에게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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