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스님이 읽는 시

_조현석 시인의 시집, 차마고도 외전外傳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9.12 09:00 의견 0

도시의 외곽 마르고 검게 병든 나무들 사이

흔들거리는 신호등 ― 빨강, 파랑, 초록의 불

모두 켜져 나올 곳을 찾지 못하고

맴돌다, 주저앉고 말았다

<벽에게 묻다> 中에서

벽(壁)은 방이나 집 등의 둘레를 가로막는 수직 건조물이다. 그러나 시인이 비유에 이르는 시어의 벽 (壁)은 무엇일까.

곤란한 경우나 부딛치는 처지일 것이다. 곤경(困境)이고 장애(障碍)일 것이다. 어떤 일의 성립, 진행에 거치적거려 방해하거나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게 함일 것이다. 벽은 너와 나에게 쌓이는 경계를 막는 한계일 것이다.

은산 앞에 닥쳐 벽을 갉작거려본 사람들은 벽이 얼마나 철벽이고 높은지 안다. 더이상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되돌아 설 수도 없는

끙 소리가 절로 나는 것이다. 그 빼도 박을 수도 없는 지점에 이르른 경계에서의 물음과 울음이 벽에 부딪쳐 되울려 귀가 먹먹해져 본 사람은 안다.

… 무겁지

… 무겁지

… 무겁지

​ 그것 봐!

부석 앞에 후들거리며 설 때

번쩍 드는 한생각

저 무거운 바위

언제부터 허공에 떠 있었을까

천근만근 근심

툭, 던져놓고

<부석사> 中에서

팔다리, 손가락 발가락 끝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이라 여기던 한 대학병원 정문을 나설 때

아득함이 바로 이런 것, 쏟아지는 노란 햇빛이

전부 벼랑이란 걸 알았다

산 너머부터 날아온 아카시아 꽃잎 싸락눈처럼 뿌려졌다

< 주렁주렁 아카시아> 中에서

시인은 말한다. 이 세상에는 벽을 마주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목숨의 면벽의 자세를 바로 하라 한다. 까불지 마라. 세상이 벽을 치는 게 아니라 시인이 밖으로 향하는 모든 둘레를 장벽처럼 굳건하게 차단했다는 뉴앙스다.

가소로운 것들, 너희들은 높으니, 나는 쓸쓸하다.

형극처럼 한걸음 나아갈 수 없는

불통을 통으로

그렇듯 시인의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을 바라보면 슬프다. 슬프지 않은 이 누구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딨냐? 절망하지 않는 인간은? 그렇다고 담장이가 되어 슬금슬금 비겁하게 그 벽을 타넘고 싶지 않다, 땡땡이치듯 쓰레기통 밟고 담치기 하고 싶지도 않다, 는 것이다.

백척간두, 아찔한 빌딩 꼭대기

발가락 닳고 짓물러 뭉개지기 전에

도착한 어느 곳

<차마고도 외전外傳 > 中에서


시인은 그렇게 우리가 가쁜 숨 토해내며 살다 도착한 곳이 차마고도, 낭떠러지 절벽이라 것이다. 이상은 날개도 없이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고>했던가. 이카루스의 욕망의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그렇게 시인은 아지랑이 피는 절벽, 낭떠러지에서 우리에게 <천근만근 근심 툭 던지면>, 백척간두 진일보, 후들거려도 벼랑에서 한 걸음 더 아찔한 아지랑이로 내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시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은

<천근만근 근심/ 툭 던지면>

낭떠러지, 벼랑, 천길만길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날들

한 마리 인간들에게도

허공으로 올라가는 하늘길,

잔도가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사는 일을 면벽이라 한다.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인고?

그렇게 봉쇄된 벽에게 묻는다.

그렇다. 위대한 침묵, 벽에게 묻는 일, 면벽은 기도다.

몸으로 고요하게 앉아서 좌선을 하고 마음으로는 흔들림이 없이 면벽구년(面壁九年)을 걸려 주먹으로 쳐 어둠을 몰아내고 마음의 벽을 깨어 내는 일. 우리가 사는 일이 수행이라고 면벽십년(面壁十年)발로 쳐내어 세계의 벽을 뚫어내야 한다. 무너뜨려야 한다, 고.

시인의 시를 읽으면 꼭 화두를 든 선객같다.

시인의 시에는

시인이 주체이고 벽은 그저 시인의 대상이고 경계 객체일 뿐이다.

여기 서있는 나는 누구인가?

조현석 시인의 <차마고도 외전外傳 >으로 나는 다시 중노릇을 시작한다.

不去不來,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벽도 없다.

벽은 마음의 조작이고

주객나눔의 분별이고 차별이고 分離나 境界線, 그 벽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살아낸다면 벼랑도 절벽도 곧 돈오돈수요 돈오점수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마치 금강경을 읽은 거 같다.

금강경에 보면 벽은 벽이 아니다, 그 이름이 벽이다. 이름이 벽일 뿐이라는 것이다. 벼랑은 절벽, 벼랑이 아니다. 그렇듯 마침내 색즉시공, 공즉시색. 自我가 사라진 無我.

시인은 벽 앞에 있는 나를, <차마고도 외전外傳>을 읽는 나까지 끝없는 벼랑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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