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면서 행복을 느낄 때는 다 다르다 한다. 나름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행복론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스님은 행복하신가봐요?>
가을 날 아침, 한 보살이 내 머무는 암자에 올라왔다. 묻는다.
<왜 보살님은 지금 불행하세요?>
되물었다. 답을 하지 않는다.
미닫이 문에 풀벌레가 찌릉찌릉 운다. 새벽에는 추워서 이불을 꺼내 덮었다.
내가 스무 살 때는 스무 살 근처의 법우들이 가까이에 있었다. 거의 도반과 가까웠다. 질풍노도, 나 자신과 싸움 없이는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청춘을 보내고 삼십 대가 되고 사십 대가 되고 그렇게 사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나는 사시예불을 끝내고 절을 올라온 보살을 말없이 건네보았다.
육십대 중반이 넘자, 변하는 게 없었다. 주위에 온통 육십 대 중반이 넘는 보살들과 처사들이다. <중 보고 절에 가나?> 돌이켜 보면 완전 그짱이다.
<나 좀 도와줄텨?>
<허리가 안 좋아서.>하며 투정 부릴 기세였다.
참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무얼 그리도 바쁘게 살았던지. <아이고 허리야.>는 나의 지청구였다.
고추밭 두 고랑의 고추를 베어내었다. 그리고 의자를 내주고 보살을 그늘에 앉게 했다. 여름은 아직 가지 않았다. 삼십 도가 넘는 밭에서 확 열기를 뿜어낸다.
<내 고추는 별 볼일 없고 그 고추나 실컷 따 가라고.>
보살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기에 농담 삼아 그렇게 지껄였다.
<스니~임.>
보살이 소프라노 음색과 함께 하얗게 눈을 뜬다. 그러나 그 농담이 싫지는 않은 듯한 눈치다.
<누가 떨어뜨린 씨앗인데 올해는 농사가 이렇게 잘 된 거지?>
내 말에 보살은 무슨 말이야? 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올해는 고추농사가 잘 되었다. 내다 팔 정도는 안 되고 육, 칠십 근은 족히 될 거 같다. 베어낸 고춧대에 푸른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약 오른 고추는 몽고간장에 삭히면 맛있을 거 같고, 풋고추는 밀가루에 버무려 찌면 맛있겠네요.>
<그래, 오늘은 왜 우거지 상인가?>
<예. 오늘 제 생일인데 이것들이 축하전화 한 통 없네요.>
<이제 사시 좀 지났는데 좀 더 기다려보라고.>
보살이 도와줘 일이 쉽게 끝났다. 숨이 가빠 쌔액쌕거리며 한쪽 고랑은 달랑무를 심고 한쪽 고랑에는 청갓과 돌산 갓 씨를 뿌렸다.
<이것들 씨를 많이 뿌렸으니 보살에게 싹이 나면 솎아갈 권리를 줄게. 행복하지?>
<개코나.>
보살의 냉소적 말에 나는 어이 없어 그만 씩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스님 참 재밌게 사시네요.>한다.
<그럼 내려가지 말고 나랑 살아.>
내가 다시 농삼아 지껄이자 그 예의 <스니~임>하고 째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니, 보살의 핸드폰이 울었다. 보살의 얼굴이 화색이 돌고 확 바뀐다.
<이따 저녁에 애들이 온다네요.>
뜨거운 햇살아래 황홀해 하는 보살을 건네본다. 아까는 지옥에 있던 표정인데 극락에라도 와 있는 듯 나름 행복한 표정이다.
보살은 내려가고 다시 내 혼자가 되었다. 문득 경련을 일으키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생전, 어머니 생신에 나는 무얼 해드렸던가? 코허리가 시큰해진다. 탄식과 같이 <관세음보살>하고 중얼거린다. 오랜 중노릇, 그 건너를 한참 되돌아본다. 칡꽃향기 내 코를 벌름벌름하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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