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글 쓰시는 게 그렇게 좋아요? 이제 뒷방 노인네처럼 굴어도 사시잖아요?>
<그렇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 어중간하네. >
점심공양을 하고 난 이후 어느 보살이 물었다. 젊은 날 내가 뼈 빠지게 일하는 걸 본 보살이었다. 자급자족이 내 꿈이었다.
<봄농사를 위해 준비하시는 거예요?>
<산이 사랑스럽고, 내가 어둡고 깊어서.> 라고 대답했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 <산다는 게 나는 I am Flying, I am sailing 중이라서 그래.> 라고 대답했다.
살기 힘든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내겐 수행이었다. <내가 선택했던 길이지. 신도가 없는 첩첩산중 암자에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하기 위해 모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글 쓰는 일, 농사짓는 일로 먹이를 탁발 할 수 있더라고. 그때는 그랬어. 살아서 가야 할 길이라고. 그리고 매 번의 마지막 길로 가고 있다고.> 내 말에 불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씩 웃는다.
<스님은 역시 곁을 주지 않으시는군요.>
<소욕지족이라고.>
보살이 픽 웃었다.
그랬다. 너무 멀리 하지도 않고 너무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뜨뜨미지근한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항상 마주보고 앉았다. 거리를 두었고 부딫히는 일을 줄였다.
<죽기를 바라면 죽을 것이고 살기를 바라면 살 것이야. 나는 살기를 바랬지.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오늘 보살을 만나고 이렇게 따순 밥먹고 차를 나눌 수 있었겠어? 보살이랑 이렇게 다 늙어서 불 옆에 앉아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
보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스님 좋아했었어요.>
<나도 좋았어. 보살의 편안함, 그리고 따스함이 좋았지.>
그때 절 일을 도와주러 왔던 사제의 눈이 반짝거렸다. 옆에 앉아서 흥미진진해진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좋았어?>
<불편하지 않았어요. 스님 뵌 지가 사십 년은 되었는데 한 번도 시주하라 하시지 않으셔서요.>
<크으.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연등 달라고는 했잖아.>>
그제야 사제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스님, 우리 바다에 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세요?>
생각은 어렵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판단하는 방식이다. 그걸 말로 하고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까짓거 가지 뭐.>
그랬다. 답답하고 우울할 때는 가금 바다엘 갔다. 바다로 갈 처지가 되지 못하면 강으로 갔다.
산중에 오래 살다보니 세계의 불가해함 아니 어쩌면 불가사의함을 나는 대양감(oceanic feeling)으로 이겨내곤 했다. 그렇게 가끔 바다에 가주는 것이다. 버닷가 모래사장에 그렇게 앉아있다 오면 나는 힘이 나곤 했다.
내가 마주쳤던 것들 그 중 물질이나 감각적 것들에서 벗어날 나이는 되었다. 이제 물질이나 감각으로 걱정하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자유로웠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오늘을 사는 게 좋았다.
<I am feeling.> <I am sailing. I am sailing. ~ 홈 어게인~ 아 엠 플라잉,
크로스더 씨이 아임 세일링 스토미 워러.
나는 안다. I don't want to talk about it. 매일매일 살아도 인생이 매일매일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사랑이란 그렇다. 소유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지금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지어 희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살아 있음으로 사랑하므로 좋은 일이다. 삶의 그 고통의 바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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