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를 대사(生死大事)라 한다.>
<왜 생사를 대사라 해요?>
입산하고 첫번째 배운 가르침이다.
<해골에는 희로애락이 없다. 눈과 귀, 코와 입이 없으므로 해골에는 갈등이 없다.>
P가 죽었다.
그리고 나는 어릴적 노스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소한이 지났고 대한이 지났을 때 다리 밑의 거지가 죽었다. 노스님이 나서서 장례를 집전해 주셨다.
꽃도 십자가도 없었다. 염도 하지 않았고 울음도 없이 그저 거적에 시신을 둘둘 말았고 꽝꽝 얼어붙은 산 초입에 곡괭이로 땅을 파서 묻고는 노스님의 장엄염불 한 자락으로 장례는 끝이었다.
<이 지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네 마음속에 그것을 건설하라. 역사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고 싶은가? 열망길, 열명길이고자 하는가. 다시 삶부터 시작하라. 그대 어디로 떠나 갔는가? 살아 남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때, 내가 물려받은 무명 두루마기 하나가 있었다.
<너 입어라, 너의 거적때기가 될 것이다.>
그 두루마기는 내게 하늘과 땅 사이의 이불이 되었고 깔고 자는 요였으며 노스님의 냄새였다.
<생사를 대사라 하지만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느니라.>
불가의 아름다운 건 그 도제식 교육([徒弟式敎育)이었다.
내가 노스님에게 교육 받은 걸 되돌아본다면 거의가 노스님의 강(講)이었다. 강(講)이란 배운 글을 소리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방법이었다. 초발심자경문이 그랬다. 텍스트는 노스님의 머릿속에 있었고 나는 노스님을 따라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외웠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을 것이다. 물건들, 사람, 조건들, 필요하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사용하는 거다. 몸도 마음도 재물도. 해골에는 요란하거나 강렬한 것들이 없다.>
그렇게 나그네가 되어 떠돌다보니 볼만한 게 많았다. 갈등을 겪는 인간들이었다. 불구경도 했고 물구경도 했으며 싸움구경도 했다.
그래도 산은 높았다, 산을 오르지 않고 어찌 산을 넘을 수 있으랴? 숲을 넘었고 산을 건너고 들을 지났다. 강을 건넜고.
P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자 마치 그 옛날 인사동 길바닥에서 손바닥을 내밀던 적음兄을 떠올렸다.
물론 한 세상 놀다 간 P와 적음兄의 행장은 달랐다. 한 사람은 시였고 한 사람은 소설이었다.
<무언가 살기만하면 된다는 마음을 버려라. 비록 허무가 너를 뒤덮을 지라도, 그러니 너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또 누구에게도 너를 설명하고 살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너의 삶이 진실하기를 바랄 뿐이다.>
강(講)에는 암송하여 낭독하는 배강(背講)이 있고 교재를 보며 읽는 면강(面講)이 있다. 나는 노스님에게 그때그때 질의를 했고 노스님은 그때마다 응답을 해주셨다.
<지무생사 체무생사 용무생사가 뭔교?>
<그기 다 사는 기다. 몸도 마음도 쓰다 버린다는 뜻이다. 잘 사는 기다. 너도 나그네요, 나도 나그네인기라.>
나도 죽을 때가 오고 있다. 죽지 않는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더 살고 싶어도 남의 몸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타인의 죽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현재를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생사(生死)는 대사(大事)다. 사는 일은 큰 일이다.
삶은 나름의 법륜(法輪) 굴리기다. 자폐자의 웅얼거림처럼 자신만의 꿀을 맛보기 위함일 수도 있고, 우리들 인간에게 던져진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몸 말 마음 글이 죽음과 꿈, 신발과 해골들이 서로 맞지 않고 삐걱거렸다 해도.
거울삼아 우리는 또 안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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