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내 가슴은 오늘도 밀려드는 저 봄의 강물들로 넘쳐 흐르고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3.19 09:00 의견 0

창(窓)문에 붙였던 뽁뽁이를 떼어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그래도 싹을 튀워 올리는 것들이 있다. 법당 앞의 움을 틔우는 수선화가 그렇고 법당 뒤 산 쪽에 노랗게 핀 복수초가 그렇다.

개울의 얼었던 물들도 서서히 녹는다.

꽃들도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와 봐요! 봐!'하며 수선을 떤다. 꽃망울진 매화며 목련숭이들, 솜털이 보숭보숭한 버들강아지들이 얼굴을 내민다.

"그럼 봄 맞이를 해야지."

여린 새싹들이 그렇듯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하여 장보러 나가기를 서둔다. 내가 사는 곳 문막은 오일장으로 3,8 날이 장날이었다. 휴지가 떨어졌다. 휴지도 사고 청국장이 먹고 싶어 두부도 사고 청국장도 샀다. 장을 다 보고 절로 돌아가려는 데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뭔일?'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데 내심 당황해하기보다 재밌어 하는 나를 발견한다.

오래 타긴 탔다. 36만 탄 차였다. 가속 시 차량이 느리게 반응하고 가속도가 떨어지는 경험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보험회사에 전화해 견인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차를 카센터에 맡기니 두 시간 걸린다 한다.

배터리가 다 되었단다, 또 엔진부분의 한 부품이 마모되어 갈아야 한단다. 다행이었다. 나는 또 차가 퍼지는 줄 알았다.

번 아웃이 된 거처럼 카센터 사무실에 앉았다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기회는 찬스다. 걷기로 한 것이다. 근처에 바로 섬강이 있었다.

"행복은 선택이고, 행복은 마음가짐이었다. 행복은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행복도 욕망이다. 그래 그동안 무엇을 경험했는가? 무엇을 깨달았는가? 마음이 평화로운 이는 행복하다."


혼자 주절거리며 걸었다.

가끔, 올 스톱, 번 아웃이랄까, 나도 다 소진 되었구나, 할 때가 있다. 하긴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차가 고장이 났는데, 내 온 생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였다. 하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곤을 느낄 나이는 되었다. 항상 넘치게 살았으니까.

그렇게 매번 한계, 경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 일상이 회전목마를 탄 것처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거기서 거기겠지만.

돌아보면 배고픔만한 병은 없었다. 교통사고만큼 황당한 것도 없었다. 아픈 것 만큼 고통은 없었다. 욕망만한 불도 없었다. 증오만큼 미운 것도 없었다.

"스님, 우린 왜 괴로워해야 해요?"

간혹 받는 질문이었다.

"살아있으니까. 우린 생명체니까."

묻는 이나, 답하는 나나 삶의 문제는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어줍잖고 허술한 게 우리네 생이었다.

그렇게 문제가 생기면 걸었다.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며 타박타박. 이제 가속 폐달은 없고 브레이크만 남은 거 같다. 조심조심, 사박사박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넘어지면 뼈 부러진다', 그러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래도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마음도 조금 한가로워졌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저 조용히 살 뿐.

그렇게 걷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산보는 내게 그렇듯 작은 여행이 되곤 했다.

걷다보니 강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나를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 있어주어 고맙다, 한다. 그리 화답하듯 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강물이 흐른다. 풀들이 나무가 꽃들이 벌써 싹을 틔우는 것들이 있다. 그냥 피는 게 아니었다. 옆으로 강물이 흘러서 내가 강둑길을 걷기에 봄이 오는 거였다.

그동안 내게 주어지고 되어지는 일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기에 고맙다거나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귀하다거나 감사히 생각도 않았으며 하찮게 여겼다.

봄이 오면 오나보다. 그저 봄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강둑의 다가오는 봄이 그리도 소중한 지를 모르고. 풀들이 나무들이 그 길고 긴 겨울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걷기만 했다.

그렇게 절에서 장보러 내려왔다가 이렇게 차가 고장 나 절에 올라가지 못하고 한 생각에 잠기는 거였다. 멈춰 섰다가 다시 강을 걸었다.강물의 너울거림에 눈을 씀벅거렸다. 내 가슴이 출렁거렸다.

"그렇구나, 내가 사는 게 기적이었구나. "

사년 전이었던가, 그때도 봄이 오던 환절기였다. 지난 번 차가 퍼져도 하필이면 운행 중에 퍼졌다. 마침 한적한 도로였다. 비상등을 켜고 기어를 중립에 놓고 노견에 세우고 견인차를 불러 인근 카센터에 갔었다. 결국 차량을 폐차장으로 보내고 검은 비닐 봉지에 노트북과 차량 사물함에 있던 cd며 쟉키, 연장 같은 것들을 둘러매고 절로 돌아왔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었다.

"스님, 차 다 고쳤는데요."

"네, 갈 게요."

그래도 차가 수리되었다는 게 이리 반가울 수가 있는가. 언젠가 내 몸도 폐차했던 지난 번 차량처럼 견인되어 화장터로 향하겠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너무 멀리 온 거 같다. 다시 섬강 강둑을 따라 돌아섰다. 그리고 걸음을 서두른다. 다시 보니 곳곳에 아직도 강물이 얼어 붙은 곳이 있었다.

"그렇게 얼었어도 봄강물은 내 가슴 속으로 흘러 흘러 들어오고 있었구나. 그래, 봄이로구나. 봄이다. 이 비 그치면 강나루 따라 봄이 오겠구나."

봄이라 입 속으로 되뇌기만 해도 풀 향기 꽃향기가 입 안 가득 고이고 어디선가 벌 나비가 날아드는 것 같음에 씩 웃으며 흐르는 강물들에게 '안녕, 또 보자'하며 빠이빠이를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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