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김지헌
저 우두커니를 보고 있으면
지나간 누군가의 생을 보는 것 같다
불 꺼진 저녁의 외딴집
눈 코 입 떨어져 나간
저 우두커니를 보면
청맹과니처럼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할 말이 많아도 입 꾹 다문 채
소신공양 하듯 스스로를 무너뜨리며
존재를 지워가는 사람
저 우두커니를 보면서
지금 지구 한쪽에서 죽이고 죽어가는
이름 모를 병사를 떠올린다
영혼 없이 적진을 향해 총탄을 날리다
한 줌 이슬로 사라져가는
하얀 도화지 위
분수처럼 솟구치던 아이들 웃음소리
가난한 어떤 생에도
찬란燦爛의 한 순간 있었을 것이다
고요히 지상으로 착지하는
눈송이들에게 묻는다
일그러진 모습으로도 홀로 빛날 줄 아는
다만 세상일에 어리숙한 우두커니들에게도
축복처럼 은총 내려줄 수 있느냐고
김지현 시인.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는 『심장을 가졌다』, 『다음 마을로 가는 길』, 『회중시계』, 『황금빛 가창오리 떼』, 『배롱나무 서원』 등이 있으며, 풀꽃 문학상. 미네르바 문학상 (2020년) 수상.
# 시를 읽다 보니 푸른 새벽, 나도 그 어떤 우두커니가 되었다.
있는 그대로 살았다. 화두가 막히고 길이 끊어졌을 때 우두커니 섰다. 섰다가 털썩 주저앉아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도카니 물었다.
그래서 이 길은 더 간절했다. 살아야 하는 날들이 절실했다. 간절암, 절실암 주지답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많은 길이 있는데.
마이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런데 왜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해 안달을 하는 거지?
숲속의 작은 오두막, 영토를 지키려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멈춰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삼계(三界)가 다 마음 안에 있었다.
푸른새벽 우두커니 나의 우주는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들, 사랑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면서 몇백번을 우두커니 섰던가.
돌아보면 일생이 그랬다. 몇백번이나 어물거렸던가. 꽃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얼마나 머뭇거렸던가. 소리를 지르고 얼마나 비명을 내질렀던가. 그 모든 웃음과 모든 울음을 위해.
다시 일어서 손을 잡는 그 어떤 우두커니가 되기 위해.
멈추면 보였던가. 중심도 방향도 흔들리는 푸른 새벽, 몇천번을 우주에 서 있었던가. 죽도록 슬프고 아름다웠던 우두커니가 되기 위했던가.
아무리 우두커니 서도 이제 책임을 지어야 하는 중년(中年). 달아날 곳은 없었다.
삶, 가슴에 났던 병들, 누가 그 열정, 욕망, 행각을 죄라 몰아칠 것인가.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어리숙한 우두커니가 될 수 있게 해 준 시인이 고맙다.
비록 우리들의 삶이 눈사람처럼 녹아내릴 빌 공(空)이라 하여도
봄향기, 들풀들의 저 초록 같은 존재들이 지워질지라도
축복이었고 은총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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