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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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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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이 있는 집
-homo cupiens-*
김추인
깊으나 깊은 내 안, 무허가의 오두막 한 채
그대 모르지
늑골 밑 붙박이로 지어 숨긴, 길 없는 외딴집
비 오면 오는 대로
오도카니 빗소리나 듣다가
폭설 흩날리면 사무치게
그대 꺼내 안고 눈폭풍 속을 걸어 나가는
아마도, 그래 아마도
오래 반짝이다 사윌 설화 한 토막
그냥 꿈, 꿈이어도 좋아서
그대도 모를 내 안의 오두막집, 기척 없이도
저 홀로 글썽글썽 눈이 부신거야
* 호모큐피엔스; 욕망하는 인간
김추인 약력
1986년 「현대시학」등단 『모든 하루는 낯설다』『해일』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등 한국의 예술상 (2016.)
질마재문학상(2017), 한국서정시문학상(2021) 손곡문학상(2023)
# 김추인 시인의 시집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를 펼치자 이번 생 "나는 어디까지 왔나,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를 되뇌여 보았다. 그러다 시인이 직접 보내주신 시, <다락방이 있는 집>을 읽으며 새벽 하늘을 한참 노려 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던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
비가 그치자 새벽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여전히 희망이고 아픈 날들이었다. 밤은 늘 어둡고 무섭기만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이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살았던 날들, 인간동물로 그날들이 변명이 되지 못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더 두고 싶은 까닭은 없었다. 하지만 꼭 끝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인은 <길을 나서면/ 길이 먼저 길을 내주었고/ 바람이 등을 밀어 주었다>고 했다.
뜬구름 처럼 떠돌았던 날들. 무엇을 욕망했던가. 야릇한 압박감. 가슴을 짓누르던 길 없던 길. 밤새 내내 깨어있던 아득한 걸음들, 허덕거렸던가. 간절한 발작이었던가.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웠던 날들. 머물기 위해 떠나왔던 길. 유령이 된 듯 걸음을 멈추었다.
희망에 의했던 열망들이었나. 시의 편편들이 자코메티의 조각인간들로 내 밤을 허물고 쳐들어왔다. 이 푸르디 푸른 새벽, 생의 꿈의 한 모퉁이를 돌아 다시 어둠으로 가뭇 없이 달아나는. 아, 이 사막에서 어쩌라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그 영혼의 다리들. 떠나갈 때가 되자 조바심을 내는 것인지. 그렇게 욕망이 환상이라면 욕망의 꺼짐은 환멸이라는. 난감하고 참담하고 고통스러웠던 홀쭉해지는 다리들, 갈수록 더 작아지고 가늘어지는 인간동물로서의 길어지는 날들.
<그냥 꿈, 꿈이어도 좋아서
그대도 모를 내 안의 오두막집, 기척 없이도
저 홀로 글썽글썽 눈이 부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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