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의견 0

봄에서 여름으로 오는동안, 뻐국새 그리 울더니 요즘은 앞산뒷산에서 홀딱벗고새가 운다. 검은등지빠귀. 검은등뻐꾸기.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에 사랑도 홀딱벗고 번뇌도 홀딱벗고, 물처럼 바람처럼, 하며 노래를 불러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오늘은 어디서 헤맬까. 장마가 오기 전에 고추밭 두 번째 줄을 매주어야 하고 고추, 토마토, 가지, 오이는 장마가 오기 전에 추비를 주어야 한다.

하여 가지와 토마토밭에 우뚝 섰다. 그러자 알알이 맺힌 토마토들이 웃으며 "오셨어요?"하고 내게 마음을 내어준다. 그 눈빛을 보니 참 선하다.

사랑하기, 희망하기는 내 큰 목표였다. 돌아보면 사랑하지 않았다. 희망하지도 않았다. 생이 자유롭지 못했고, 평화롭지도 않았으며 그물에 걸린 새처럼 칼날을 밟고 사는 것 모양 살았다. 내가 붙잡고 있던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내가 여기까지 인가." 했다. 그러던 중 보리라는 이름의 그 열 한 살의 아이를 만났다.

"스님,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가?"

"응, 난 산으로 가."

중증 장애아들을 보호하는 기관에 가서 일주일에 한번 아이들 목욕을 시켜 줄 때였다.


"산에는 왜 가?"

"나를 찾으러."

"산에 가면 스님이 있어?"

"....부처님이 계셔."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아이가 내가 사간 빨간 토마토 알갱이 하나 받아 먹으며 물었다.

"어디에?"

"여기에."

나는 내 가슴과 소년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히히. 난 바다를 보고 싶은데. 절벽 앞쪽에는 바다, 이쪽에는 나무와 풀과 꽃들이 피어 있는 곳. 하늘에는 기러기 날고.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참 앉아있고 싶어."

소년이 말하며 맑게 웃었다.

소년에게 바다로 데려다 주겠다던 약속은 지켜주지 못했다. 아니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내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소년이 먼저 이승의 바다를 건너갔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중생이고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인 것이다. 어리석으면 부처가 중생이지만,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다.

"그래, 난 이대로 그냥 중생할래." 하며

깊게 숨을 내쉬고 알알이 맺힌 토마토들을 한참 내려다 보는데 앞산인지 뒷산 어디선지 '스님바보, 스님바보"하고 소년대신 검은등지빠뀌가 놀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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