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장마다.

비는 오지 않고 연일 폭염이다. 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이 타 들어 간다. 매일 물을 줘야 하는 고리타분한 날들이다. 물을 주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새벽에 물 주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옥수수 수염이 검게 변해간다. 저걸 따야 하는데, 하며 눈을 씀벅거렸다.

몸이 예전같지 않다. 이제 나도 늙어가나보다, 하는 날들이다. 어느새 이리도 나이가 들다니, 도통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언제까지 청춘일줄 알았다. 가당찮게도 봄에 토마토며 오이 가지 호박들 욕심 내어 별거별거 잔뜩 다 심어놓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늑한 시간이었다. 천년만년 살 줄 알았다. 헤아려보면 그 동안의 삶들은 황홀했다. 자급자족의 날들.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날들이다, 하며 호탕하게 살았는데 이젠 폭싹 늙었구나, 하는데 절깐을 기어 오르는 차소리가 들려왔다.

"스니임."

"옥수수 따가요."

마침 노보살에게 연락이 왔었다. 옛날에는 내가 옥수수를 따서 택배로 보내주곤 했다. 옥수수를 따서 박스에 넣으면 편지를 배달하러 오는 우체부에게 전해주면 우체부가 그 택배를 보내주곤 했다. 요즘 우체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승용차를 끌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 내가 따줄 수는 없었다. 그러는 내가 나에게 조금 화가 났다.

"스님, 손자가 학교를 중퇴했네요."

"......."

노보살은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입산한 나를 떠올렸다는 거다.

"스님은 왜 학교를 그만 두셨어요?"

"나? 나는 집에 가보니 우리 집이 없어졌더라고."

"너는?"

소년의 얼굴은 하얬다. 소년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도 게임, 점심에도 게임, 밤새워 게임을 한다는 거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박스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었고 소년의 어머니는 식당을 한다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이혼을 했다 했다.

"인마, 그렇다고?"

옥수수 한 고랑을 따다 뒤통수를 딱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 뿐, 분개하지 않았다.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렸던 소년의 어머니라 했다. 다만 어이없는 웃음만 절로 나왔다.


"이거 좀 들어줄래?"

"......더워요."

염천에 옥수수를 따는 노보살과 나를 '사먹으면 되는데'하며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소년이 말했다. 그러나 나의 눈빛에 옥수수 보따리를 들었다. 폭염과 열대야로 허리가 욱씬거렸다.

"스님이 우리 할머니 애인이셨어요?"

"아니."

대답을 하던 나는 '그렇지, 애인들 중 하나였지'하고 대답을 고쳐 말하다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노보살이 나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거였다.

소년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다 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이 된 단다, 그 습관은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되지.'라는 훈계 같은 건 이미 소용이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 너의 할머니가 죽으면 어떨 거 같아?"

".....슬프겠죠."

"너의 엄마가 죽으면?"

"오 층 짜리 건물은 저의 것이 될 거고 부자가 되겠죠."

소년과 '가슴 벌렁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웠던 때가 제게도 있었어요'하던 노보살이 산을 내려갔다.

혼자가 된 나는 냉장고에 찬 물을 꺼내 마시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 옛날 유년시절 노스님에게 물었었다.

"어디 가세요?"

"보물을 찾으러."

노스님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나를 데리고 바다를 보여주시려고 바다로 가다가 가다가 나의 질문에 걸음을 멈추곤 하셨다.

"보물이 어디에 있는데요?"

"내 안에. 너의 안에."

냉수를 마시고 속을 차리곤 난 후 '그래 마음이 부처요, 법인 것을. 바다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인연의 사슬에 묶이고 몸부림쳐 왔던가.'하고 주절거리며 선풍기 앞에 앉았다. 그동안 어슬렁거리며 함께 돌아다니던 보리가 혀를 빼물고 헉헉대며 다가와 선풍기 옆으로 앉으며 한 소리한다.

"죽지 못하고 살았는데 살지 말자니 죽는 게 그렇고 살자니 이놈의 남은 생이 애매모호 하시죠?"하며 위로하는 거 같다.

여기까지 오는 게 그리도 힘들었다니, 아픈 몸과 설운 맘으로 꼼지락거리다 얕은 신음을 내뿜었다. 아무튼 내 나이 칠십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도를 닦는 과정이나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은 그렇듯 매양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