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간지주
이서화
간혹 어떤 옛것들엔
아득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법천사지 당간지주는
염불 소리도 목탁 소리도 지킬 일 없어
긴 그림자를 쌍으로 드리운다
천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자를 옮겼을 당간지주
그래서인지 지주도 그림자도 조금 닳아 있다
매일 그림자를 내어놓고도
여전히 굳건한 당간지주
오전 햇살에 누운 그림자 끝
민들레가 그 옛날 번성했던
오색 깃발인 양 걸쳐진다
배후를 잃은 초입이 할 일이란 딱히 없다
뒷소문도 앞소문도 없으니
이 또한 산문(山門)이려니 한다
다만 오전과 오후를 그늘로 옮기는 일로
불사(佛事)를 전념했다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지주 멀어지거나
좁히지 않는 일로 용맹 정진했다
오랜 시간 동안 축난 돌의 부피에
또 그만큼의 이끼가 살풋 보태진다
하루하루를 세지 않았으니
쌓여있는 것도 없다
이서화 시인/ 강원 영월 출생. 2008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굴절을 읽다』『낮달이 허락도 없이』『날씨 하나를 샀다』『누가 시켜서 피는 꽃』. 현재 이서책방 책방지기로 일하고 있다.
# 이서화 시인의 시는 시인의 힘에 함뿍 젖어들 수 있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힘이란 시인의 고요한 인생관과 평화로운 세계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당간지주, 법천사지에 서있는 커다란 돌덩어리 두 개로 이미지를 제시해 놓고 독자들로 하여금 연상케 하는 것이다. 또한 시행 전개의 솜씨가 빼어나다. 도대체 시인의 시에 무엇이 숨겨져 있기에 자못 빠지게 될까, 를 생각해 보았다. 그저 상상력에 의해 쓴 시가 아니라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폐사지의 당간지주를 관찰하고 성찰하게 함으로 우리네 삶을 통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옛날 큰절에 법회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입구에 당(幢)이라는 긴 깃발을 걸어두었다 한다. 그 깃발을 양쪽에 붙들어 매 고정, 지탱하는 기둥 2개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요즘은 옛날처럼 당간을 걸어두는 절간은 거의 없다.
시를 읽는데 나는 어쩌다 절간에 와 살게 되었을까, 하는데 갑자기 시인이 법천사지의 당간지주를 내게 보내 내 눈 앞을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있는 거였다. 이번 생도 아픈 몸으로 천지창조나 개벽, 혁명 같은 건 꿈도 못 꾸는데. 설운 마음만으로도 벅찬데 불사를 하는데도 벅찼는데 남은 생도 찰나라 깨닫지 못해 가슴은 벌렁거리고 눈시울은 뜨겁기만 한데.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수행자로 나를 찾기 위해 떠돌았을 뿐이었다.
실패했다. 시인, 작가로도 실패했고 매일매일 또 실패하느라 짓무른 내 몸은 괴로웠다. 온몸은 뜨거웠고. 닳고 낡아 이제 그날이 오면 생명현상이 끝나거늘. 법천사지 돌탱가리는 천년을 천백억화신 본래면목으로 迷도 넘어서고 悟도 넘어선 채 험로 협로, 그 험하고 좁은 길을 지나 아직도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시인에 의하면 다만 이끼가 끼고 바람과 비에 조금 축이 났을 뿐 이라는데.
시방세계 두루두루 땀 흘리고 눈물 흘리는 저 당간지주들, 이 사바세상을 사는 일이 도를 닦는 과정이요, 깨달음 평화를 구하는 과정이라는 시인. 가까이에 있는 법천사지에 혼자 설설 걸어가보니 그 앞에서 두 손 모으고 합장 배례해보니 고요하고 참 평화롭다. 풍경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뿐.
<오전과 오후를 그늘로 옮기는 일로
불사(佛事)를 전념했다면>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살아갈 남은 생은 아무래도 나도 오전(悟前)을 오후(悟後)로 만들어 내야 할텐데
꼭 초파일만 되면 농번기랑 이리 딱 겹치는지
돌아오는 길에
걸음걸음 돌 기둥 두 개가 눈앞을 아른거리는지
이 봄, 송화가루 날리고 山色은 초록으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