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중에 사는 승려다. 정진하고자 하는 수행자다.

죽는 거보다 사는 게 좋다. 굶주리는 것보다 충분히 먹는 것이 좋다. 노예보다 자유로운 것이 더 좋다.

도전의식과 열정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다. 도전의식과 열정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수행이란 내가 생을 내가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수행자로 가진 것도 없고 물려받은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내가 행복해 하는 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은 한 판의 영화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정진하는 삶에는 러브 스토리가 있다. 사랑 얘기는 늘 재미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세상의 주인, 주인공으로 살 때, 하지만 그 라이프 스토리는 감동적이 된다.

수처작주입처개진, 내가 이 세상에 주인공인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삶의 주연, 내 생의 엑스트라 방관자가 아닌. 존재의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 생활의 창조자. 창작자가 되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환경과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간다, 몸과 마음은 환경과 조건에 따를 수 밖에 없다.


편암함이니 불편이니 행복이니 평화니 하는 단어는 인간의 상호작용과 공감이다. 결국 우리들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살고, 죽을 때만 죽는 것이다.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고 주변인, 경계인, 지나가는 행인으로 마음을 챙기지 못하고 간혹 서성거리기도 하지만

부족하고 모자르고 초라해도 행복한 이가 있고 많은 걸 가졌는데도 불행한 이들이 있다. 몸도 마음도 다 쓰다 가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다. 행복도 불행도 다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아는 지인 중에 재벌가의 형제인데도 늘 불행하다는 이가 있고 미국에서 철학 박사학위까지 받고 강의할 곳이 없어 시간강사를 하다 아내가 하는 치킨집에서 통닭을 튀기면서 늙었는데도 행복해 하는 이도 있다. 공부하느라 부인이랑 늘 떨어져 살았던 까닭이라 했다. 혼자만의 삶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은 더 중요하다.

살펴보면 구하는 바가 있으면 괴로운 법이요, 인과와 업연에 따라 살고 구하는 바가 없으면 즐거워하는 경우가 많다. 수행자들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는 걸 옆에서 보면 거개가 지족(知足),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을 아는 삶이었다.

나도 나그네, 너도 나그네. 우리는 모두 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나그네인 것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언제라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구속받지 않는다면 자유인으로 소유를 지향하는 삶이 아닌 지족, 사용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