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디 가고 싶으세요?"

새벽기도를 마치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둘째 상좌놈에게 전화가 왔다. 고양 파주 투데이 칼럼에 나이 든다는 거, 쓸쓸하다는 거, 고독하다는 거에 대해 엄살을 부렸더니 그걸 본 모양이다.

"새벽강엘 가고 싶어."

"왜요?"

"강에 앉아 새벽이 오는 걸 보고 싶어서."

모든 여정은 내가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살았다.

​ 새벽강에 관한 시들이 많지만 시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직접 가서 보고싶었다.

쓸쓸한 날이면 새벽강을 찾아 떠나고 돌아오곤 했다. 사진도 찍고. 허나, 가고 싶다 해서 막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잊었다., 며칠 후 폭염과 열대야 사이로 둘째가 왔다.

"가요."

"뭐?"

"인생은 선택이고 기회라며요?"

크으. 이제 기회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나.

인생의 전체는 또 다른 기회에 관한 것이며,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까지, 언제나 또 다른 기회가 있다, 며 너스레를 떨었다.

2.

새벽 강에 앉았다.

은하수가 하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유유히 흘렀다. 황도 12궁 중 백조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강변 오른쪽으로 견우와 직녀가 거대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어둠, 미명속에 여치며 쓰루라미 귀뚜리 같은 풀벌레가 울었다.

강가에는 물앵두며 수수꽃다리 꽃들이 피어있었고 물 위로는 물풀들, 연꽃들이 피어 있었다.

너희들은 좋으니?

네, 저희는 저 강물소리를 들으며 꽃을 피울 때가 좋아요.

물가의 노랑 어리연이 답했다.

스님은 밤하늘의 별들이 좋으신가보죠?

바다로 가는 이들은 하늘의 별들을 좋아하지. 너희들이 내게는 별이야.

어떻게 하면 진정한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요?

연꽃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하늘과 땅, 나무와 풀들과 저 강물과 함께 하면 돼.

만물은 일체지(一切智)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문이요 수레요 배요 햇불이요 길이고 다리라고. 만사가 비로자나(Vairocana)고 광명변조(光明遍照)야. 변일체처(遍一切處)라 하기도 해.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비로자나불이라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언제나 발현되고 있다고. 그러니 꽃들, 저 별들. 모두 광명변조라고.

강 건너편,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강물이 시간과 공간 알 수 없는 너머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나, 강원도, 근데 그 이전에는 어머니 뱃속에서. 근데 어디서 왔냐, 보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봐.

어디로 가세요?

나? 바다로! 우리는 모두 서로의 바다로 가고 있는 중이야.

길이 어디 있는데요?

길을 나서면 길이 나타나. 우리는 각기 모양도 다르고 성격도 달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바다로 가면 우리들의 모양과 이름이 없어져. 그냥 모두 바다가 되는 거야.

뭐하러 가요?

여기 가만히 있는 거 보다는 좋잖아. 화엄의 바다로 가는 게 얼마나 멋지냐?

화엄의 바다요?

너는 꼭 의심병'에 걸려 있는 거 같구나. 내가 나를 찾아 가는 거지. 매 순간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러. 헤메러 가는 거야. 나는 내가 무지(無知)하다는 걸 알았어. 살면서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해방되려고. 깨달음의 길을가려고. 마음에 깊은 보리심을 내었어. 어리석음, 그 무명을 깨뜨리는 일이지.

고통에 벗어나서는 요?

나를 찾는다? 그럼 나를 놓아줘야지. 자유, 행복찾아 가는 길이야. 그게 바로 보살행이고 열반이라고.

보리심을 내고, 보살행을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헛된 욕망, 헛된 망상이 아닐까요?

헛되다면 헛되고 보람 된다면 보람 되고 먹고 자고 싸고 그냥 바퀴벌레처럼 살 수만은 없잖아. 어쨌든 나도 너도 이 고통이 바다를 건너 큰 바다로 가게 될 거야.

어쨌든 가보세요. 묘각(妙覺)의 바다는 없을 거예요. 다만, 바다는 끝없이 넓고 깊으며 그 속에 많은 고기와 보물들이 있고 바닷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니까요. 그런데 가다보면 세계에 머물며, 지치거나 싫은 마음이 나지 않을까요?

일체의 유위법이 마치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음(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을 알고 가면 돼.

스님, 스님을 증명해 주는 건 뭐예요?

연꽃들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응? 먹물옷에 빡빡머리, 나의 모양이 아니다. 바람도 구름도 아니다. 그렇다고 저 바다로 떠나는 강물도 아니다. 여기까지 오게 한 바로 나지.

3.

다시 절깐으로 돌아와 보니 암자 마당에 잠자리들이 에어 쑈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 한 쌍의 겹눈이 있었고 가슴에는 큰 두 쌍의 잎 모양 날개가 있었다. 머리와 가슴 쪽을 자세히 보면 마치 비행기 같았다.

날개는 네 장이지만 앞날개 두 장만으로도 나는 데에 지장이 없다, 했다. 하지만 굳이 2개가 더 있는 이유는 새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 현란하고 불규칙적인 비행패턴을 위해서 라고 했다.

하나 둘 스물 서른 마리도 넘었다. 필봉, 미륵산 쪽에서 현계산 부문재 쪽으로 그러니까 동에서 서로. 우르르 한 방향으로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돌아서 반대방향 서쪽으로 비행을 했다. 가만히 보니 저렇게 많은 잠자리들이 위로 아래로 한 곳을 나는데 서로 부딪혀 충돌하지 않는 거였다.

4.

나도 저 잠자리들처럼 이제껏 무엇이 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랬구나. 그렇게 외로운 길을 걸어왔구나.

Travel’(트래블)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어머니가 출산할 때 겪는 산고의 고생이나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Travail’(트라베일)에서 유래됐다, 했다.

집 나오면 여행이다. 여기서 어머니를 집으로 보는 거였다. 한참 생각했다. 어머니 뱃속이 나의 집이었구나, 한다.

너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우리는. 여행자, 집을 나오면 여행자가 되는 거였다.

아, 우리들의 삶이 지구별 여행, 얼마만큼 왔던가. 어디까지에 와 있는지.

번뇌에 머물지도 말고 번뇌에서 떠나서도 아니 되는 것을.

이 세상에서 머물지도 말고 저 영원에도 머물 생각을 하지 않는.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