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바닷가의 추억

_만리포 사랑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8.05 09:00 | 최종 수정 2021.08.05 10:20 의견 0

그날 당신의 숨소리는 거칠었어

온몸을 타고 넘는 파도소리

나를 아득하게만 했고

달라붙는 모래와 사금파리들

타다 남은 잿더미와, 휩쓸려가는 싸움소리며

바다는 멀고 낯설기만 했는데

나의 젊음은 검푸른 밤하늘 밑에

무겁게 무겁게만 누워있었어

여기는 어디일까, 문득 별이 떨어지고

식은 눈물 한 방울 만리 밖으로 흘러갔어

-졸시 <만리포 사랑>

젊은 날, 해수욕장에서의 기억은 참혹하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속된 욕망과, 마침내 바다에 닿았을 때의 그 황폐함이라니. 발정난 개처럼 쏘다니다가 아무 곳에서나 공연한 싸움판을 벌이고, 기어이 병나발에 취해 떨어졌을 때, 밤바다는 어둡고 축축했다. 그러나 보라. 한밤중 나의 취기를 깨우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그리고 그리움처럼 어디론가 떨어져가는 유성의 아스라한 꼬리를.

불순하고 조악했던 우리들 추억의 대부분은 서해의 어느 바닷가와 맞닿아있기 십상이지만, 알고 보면 서해의 바닷가처럼 아늑하고 내밀한 곳도 없다. 특히 톱니바퀴 같은 태안의 해안들은 리아스식으로 바다를 밀고 당기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백사장들을 숨겨놓았다. 이원반도의 끝자락 만대에서 꾸지나무골을 거쳐 학암포며 구례포, 신두리의 해안사구와, 다시금 소원반도로 건너가 구름포에서 십리포,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숨 가쁘게 모래를 토해놓는다.

만리포해수욕장 ⓒ유성문(2006)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청춘에 젊은 꿈이 해안선을 달리면 산호빛 노을 속에 천리포도 곱구나 -반야월 <만리포 사랑>(1958)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고두현 <만리포 사랑>(2005)

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은돌이며 파도리, 통개에 이르는 아랫도리로 잠시 빠졌다가 근흥반도의 연포를 거쳐 갈음이로 저문다.

갈음이의 달빛은 수상하다. 옅은 이내에 싸여 때론 교태롭고, 때론 애잔하다. 달뜬 송림 사이에는 죽은 여배우의 그림자가 스며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은주는 바로 이 숲에서 왈츠를 춘다. 그 왈츠는 관능이라기보다는 청순에 가깝지만, 왠지 모를 청승도 슬쩍 묻어 있었다.

모를 일이다. 우연을 가장한 어떤 사랑이 이 숲 속에 숨어 있어 밤늦도록 은밀한 숨소리를 토해낼지도. 나는 모르는 척, 그 허튼 망상 위에 텐트를 치고 흥건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모르는 여인과 몽산포의 바닷가를 달리는 꿈을 꾸었다.

몽산포해수욕장 ⓒ유성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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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에서 603번 지방도로를 타고 20㎞ 넘게 달리면 이원반도의 끝자락 만대에 이른다. 가로림만을 사이에 두고 서산 대산의 벌말과 마주하고 있는 만대마을은 호젓한 포구와 염전들로 갯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옛날 한 풍수쟁이가 ‘세기말에 가서는 많은 사람이 사는 풍요로운 마을이 될 것’이라고 마을 이름을 ‘만대’라 했다지만, 세기말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20여 가구를 넘지 못하는 오지마을일 뿐이다.

꾸지나무골 ⓒ유성문(2006)

만대에서 다시 온 길을 거슬러 내려오면 꾸지나무골이 나온다. 작고 아담한 해변가의 꾸지나무골은 ‘아늑하고 정겹다’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다. 하루에 버스가 대여섯 번밖에 다니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꾸지나무골은 그래서 아는 사람만 다시 찾는 숨겨진 해수욕장이다. 1㎞가 채 넘지 않는 백사장은 태고적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해변을 둘러싼 송림은 야영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아버지는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기고,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백사장을 거닐면서 조개껍질을 주을 수 있는 한가로움은 꾸지나무골에서 바다가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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