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56억 7천만 하고도 365 곱하기의 구비를 넘어 비로소 내게로 온다 내게로 오기 전 도솔의 바다에서 잠시 배를 밀고 다니며 놀고 있다 그리움은, 365를 56억 7천만이나 곱하고서야 마침내 내게서 저문다 저물기 전 시뻘건 놀로 마지막을 태운다 넘고 넘어서 기어이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닿을 저 빛과, 그 빛 사이를 떠도는 그리움과, 모든 머물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섬만이 홀로 외로움으로 닻을 내린다 아아, 배보다 먼저 닻을 내린다 –졸시 <미륵섬에서>
통영의 미륵도는 희한하게도 해저를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다.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의 좁은 물목인 착량(鑿梁)은 임진왜란 당시 쫓기던 왜선들이 물길로 착각하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급히 땅을 파고 물길을 뚫어 도망쳤다는 곳이다. 그래서 ‘판데목’이라고도 하고, 그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은 왜군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여 ‘송장목’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일제는 이곳에 운하를 파서 물길을 넓히고 그 밑에 터널을 뚫었다. 일제가 다리를 놓지 않고 굴을 판 것은 왜군들이 죽은 곳 위로 조선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2005년 문화재청은 이 해저터널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하면서 ‘통영 태합굴(太閤掘) 해저터널’이란 일제시대 때의 명칭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썼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태합’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칭이라는 지적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문화재청장이 사죄를 하고 ‘통영 해저터널’로 고치기는 했으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어찌 비단 이뿐이랴.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아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을 어찌 짧은 글 속에 다 담을 수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리운 나폴리’라는 한마디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폴리’가 그냥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때, 통영은 가장 나폴리답다. 남망산공원에 올라 잠시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라. 강구안에 모여 있는 바다는 너무도 아늑한데, 만선의 깃발을 단 배는 통, 통, 통 거리며 포구로 돌아온다.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장 선창가는 길보다 사람이 많았소. -유치환 <귀고(歸故)> 중에서
그 많은 사람들, 청마 유치환과, 영원한 연인 이영도와, 돌아오지 못한 윤이상과, 소요하던 이중섭과, 전혁림과, 박경리와, 김춘수와, 김상옥과, 속 없는 김밥을 말아 팔던 어두리 할머니와, 나전쟁이와, 갓쟁이와, 어장애비와, 구릿빛 수부(水夫)들, 그렇고 그런 사람들, 그리움으로 스쳐왔다 그리움으로 스쳐간다.
다찌집에서 지새운 밤은 어떻고, 새벽 서호시장 시락국집의 해장은 어떠했던가. 통영운하의 불빛과, 미륵도 달아공원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저녁놀은 어찌할 셈인가. 한산섬 달 밝은 수루와, 소매물도 등대섬과, 사량도의 야광바다는 또 어쩌란 말이냐. 아아, 나는 더 이상 말 못하겠다. 돌아서자마자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통영과, 통영을 향한 그 끝 모를 그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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