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있다. 아내가 1년 전 비탈서 미끄러지면서 왼쪽 다리 복사뼈 골절상을 입었고, 이제 그때 박아 넣었던 일곱 개의 나사를 빼낸다. 그 당시 “판자대기가 갈라졌어? 그럼 조각을 덧대 고정하는 게 맞겠네!” 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1년이 지나 뼈가 고정되었다니, 나사는 이제 불필요한 게 되었겠네!” 이렇게 단순한 생각이었다. 1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게 간단한 일이었다. 나사를 박은 부분만 째고, 나사를 풀어 빼고, 봉합하면 되는 일이니까.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병원의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공원이 좋은 이유는 다른 이들을 차근차근 지켜볼 수 있어서야!” 이런 이야기를 해준 건 전 서울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 이강오 선생이었다. 공원이 제공하는 것은 숲만이 아니라 여러 삶의 풍경이고, 이를 통해 우리가 공동체성과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확산해 간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건 좋은 아이디어였다.
아내가 이틀쯤 입원할 이 병원은 관절과 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제법 규모가 있는 병원이었다. 병원엔 아기로부터 소년들과 소녀들, 아줌씨와 아저씨들 그리고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로 붐볐다. 저 사람들은, 간호사들은, 의사들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아내가 병원에 가져온 소지품 중에는 책도 있었다. <피프티 피플>. 도서관서 빌린 책이라 책등엔 남색 라벨이 붙어있다. 아내의 수술시간에 그 책을 펼쳤다. 쉰 명의 사람 이름이 목차로 나왔다. 첫 장엔 시한부 삶을 선고하는 의사와 그 판결을 받은 엄마와 결혼을 앞둔 그 딸이 등장한다. ‘딸의 결혼식인지 엄마의 미리 치루는 장례식’인지 분간이 안 되었던 풍경이 3인칭 서사로, 혹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펼쳐진다. 다음 장엔 56번을 칼에 찔려 들어온 환자. 빵 자르는 철제칼로 목이 거의 잘린 여자애, 그 피바다를 두 시간 넘게 지켜볼 수밖에는 없는 ‘귀에 벌이 들어가 윙윙거림을 참고 있는 사내’가 응급실 레지던트 1년차 의사의 눈에 보인다. 그는 독백한다.
“다음 당직에도 사람들이 많이 오면 좋겠다. 기왕이면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놀이공원 같아. 굉장히 참담한 놀이공원이지만 놀이공원 같아. 아드레날린 정기는 만족스러웠다.”
독자에게 만족스럽게도 이렇게 펼쳐지는 50명(실제는 51명이고 당연히 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은 서로 엮인다. 조폭이 아닌 ‘일반인이, 일반인에 의해’ 어떻게 하면 쉰여섯 번이나 찔릴 수 있는지 그 상황이 나온다. 목 잘린 여자애는 어떤 애였고, 어떤 상황서 그리 됐는지, 그의 친구가 어떤 방식으로 친구를 추모했는지 이야기도 차근차근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귀에 벌이 들어간 사내의 후일담도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점차로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온 소설의 전통에 부합한다. 동시대의 세태(이 소설엔 가습기 살균제 환자, 산재사고, 지하방 모녀 동반자살 등이 나온다)를 그린다. 소설의 기본 덕목을 잘 갖췄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 왜 그렇게나 드라마와 영화에 몰입할까? 그건 책 속의 이야기가 곧 내 현실의 이야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생존과 번영의 길에서,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될 여러 상황들이 거기 이미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 같이 기쁘고 슬프고 분노하면서, 온전하게 이해되는, 아드레날린 넘치는 삶으로 건너갔다 올 수 있게 된다. 그로서 내 삶은 더 단단해지고, 빛나게 된다. 겨우 책을 펼쳐 삶을 읽었을 뿐인데…,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건 또 어떤 이유 때문일까?
책에는 의사 이호 선생이 계시다. 출퇴근 시마다 응급실에 들르는 그는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세 명씩을 구한다’는 전설이 붙어있다. '슈크림 선생'이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린다.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일가를 이루셨는지요?’하고 묻는데, 그는 스스로 답한다. ‘운이 좋았다.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았다’. 친척이 도와 서울 유학을 하고 나랏돈으로 미국으로 유학했다. 굶어 죽기 직전엔 꼭 누가 도와주었다. 결핵에 걸리지 않은 것, 항생제를 잘못 쓴 치과의사 덕분에 아내를 만난 것, 그녀가 아름다움을 아는 미대생이었던 것. 그런 것이 모두 그의 행운이었다. 이 말도 안 되게 좋은 행운을 지키려면, 몇 년쯤 홀로 의료봉사도 해야하는 거 아냐? 그런 두려움도 아내가 받아주었다. 그래서 그는 해외 오지 봉사도 하고, 늙어서도 달동네를 찾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레이트 라이드’를 탔던 자신이었다. ‘발밑에서 큰 파도가 다 부서져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그 운을 달동네 아이에게 나눠주는 악수를 한다.
<피프티 피플>엔 이런 삶을 살아내는 이들로 촘촘하다.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깜냥만큼 삶을 산다. 거기 깃든 작가의 관점, 인과응보라는 삶의 비밀들,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뤄질 것 같지 않은 ‘드림 컴 트루’도 구비마다 고비마다 있다. 소설에서 우리는 환상을 보는가? 혹은 바깥 풍경으로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진짜 마음 모습을 보는가? 분명한 건 우리가 소설을 통해 우리 삶을 둘러싼 풍경의 지도를 읽고, 타인의 마음에 그의 언어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좋은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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