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메밀꽃 필 무렵
_봉평 효석문화마을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9.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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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그 꽃길을 걸었지요
나지막한 꽃들은 정강이를 적시고
우리, 그저 흐드러졌지요
노래로 치면 어찌 꽃만이야 하겠으나
사랑이야 남김없이 우리들 몫이니
그저, 흐드러졌지요
햇빛은 오롯이 옥수수 이파리에서만 반짝이고
꽃대궁은 꿈결인 양 슬려 다녔어요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대고 속삭였지요
…사랑한다고
-졸시 <봉평연가>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해마다 9월이 오면 강원도 평창 봉평 일대는 온통 새하얀 메밀꽃 천지가 된다. 한때 수익성에 밀려 사라지는 듯했던 메밀밭이 다시 봉평 일대를 뒤덮게 된 것은 순전히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장돌뱅이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이 한 편의 소설은 작가의 고향 봉평을 무대로 해서 태어났다. 비록 장평에 있던 가산의 묘소는 1998년 유족과 주민들 간에 한바탕 실랑이 끝에 끝내 파주의 통일공원으로 이장되고 말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의 소설과 소설이 주는 향취를 무던히도 되살려냈다. 그 사연이 어떠하든 메밀꽃은 다시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그 소설의 줄거리야 어떠하든 연인들은 메밀꽃길에서 마냥 즐겁다.
이효석의 메밀꽃을 보러 가는 길은 봉평이나 대화, 아니면 진부에서라도 장이 서는 날이 좋다. 이 시골장터들이야말로 ‘메밀꽃 필 무렵’의 주무대다. 비록 규모도 줄어들고 옛 모습도 거지반 잃어버려 소설 속 같은 분위기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강원도 산골장터의 면모를 더듬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에 하나들이다. 마침 봉평장은 2·7일, 진부장은 3·8일, 대화장은 4·9일로 끝나는 날 열리는 장이므로 1과 10으로 끝나는 날만 피한다면 세 곳 중 한 곳은 너끈히 둘러볼 수가 있다.
옥수수와 감자 같은 풋것들을 좌판이랍시고 벌린 할멈이나, 도무지 이런 시골바닥에서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분재화분을 늘어놓고 긴 간이의자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는 장사치나, 장터 한 구석에서 메밀전 지지는 냄새로 시장구경에 겨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인심 좋게 생긴 아낙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적어도 내게는 메밀꽃보다 더 토속적이고 더 탐미적이다. 어쩌다 허름한 주막이라도 기웃거릴라치면 탁배기 한 잔에 시름을 나누는 노인네들의 담소 속에서 ‘허생원’이나 ‘동이’의 후일담이다 싶은 이야기들을 엿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몇 점 남지 않은 이 낡은 풍경들은 이미 과거의 몫이고, 이내 사라질 시간들에 속한다. 장터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이국적인 팬션들이며 이물스런 건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양두구미재 아래 휘닉스파크나 흥정계곡 깊숙이 들어앉은 허브나라의 풍경은 또 어떠한가. 한겨울이면 어김없이 설원을 뒤덮는 원색의 스키복 물결이나, 사시사철 허브티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아로마향 같은 정담을 나누는 젊음들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주눅 들고야 만다. 객기를 부려 기를 쓰고 그들 사이를 비집어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치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뒤쳐지기 십상이다. 이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의미의 ‘된장남’인 게다.
봉평에는 이효석문학관이 있다. 2002년 개관한 이효석문학관은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전시실은 그의 삶과 문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서재를 재현하고 옛 봉평장터의 모형을 설치, 생생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꾸며져 있다. 문학교실에서는 다양한 영상물을 시청하거나 문예행사를 관람할 수 있으며, 학예연구실은 이효석과 관련한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문학관 한편에는 별도의 메밀전시관이 마련되어, 소설의 소재이기도 하면서 봉평의 테마라고 할 수 있는 메밀의 모든 것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이밖에 야외문학정원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문학의 향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비단 문학관뿐만 아니라 봉평은 마을 곳곳이 이효석과 그의 소설의 자취와 얽혀져 있다. 봉평장터와 마주하고 있는 가산공원에는 작가의 흉상과 그의 문학세계를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소설 속에서 허생원과 동이 등이 드나들었던 주막집인 충주집이 자리를 옮겨 복원되어 있다. 흥정천 다리를 건너면 메밀밭이 펼쳐지고, 그 들머리에는 ‘이효석 문학의 터’임을 알리는 기념비와 물레방앗간이 있다. 물레방앗간은 허생원과 성서방네가 연분을 맺었던 곳이다. 이어 시멘트길을 따라 이효석문학관 입구를 지나면 이효석생가터가 나온다. 비록 원래 있던 집을 헐고 다시 지어 옛날 모습은 사라졌지만 이곳이 이효석문학의 탯자리임은 분명하다. 한쪽에 놓인 방명록에는 이효석과 그의 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흠모가 물씬 배어 있다. 이렇듯 봉평은 마을 전체가 온통 이효석이며 그의 소설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효석문화마을’이며, 그 주인공은 바로 ‘숨 막힐 듯’ 피어나는 메밀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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