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바람은 노을 되어

_바우덕이와 안성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9.23 09:01 | 최종 수정 2021.09.23 17:53 의견 0

안성 남사당바우덕이축제 ⓒ 유성문(2006)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마을 높은 언덕배기에 남사당 기가 내걸렸다. 무리들은 마을사람들 보란 듯 한바탕 풍물을 쳐대고, 패거리 한 명이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마을어른에게 놀이판을 청한다. 이윽고 허가가 떨어지면 의기양양 남사당 기를 앞세운 무리들은 길놀이를 펼치며 동네로 들어선다. 마을 한복판에 대여섯 장의 커다란 멍석이 깔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명나는 연희가 벌어진다. 놀이는 모두 여섯 마당이다. 풍물(농악), 버나(접시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로 숨 가쁘게 이어지고, 동리는 사람들의 환호로 가득한데 서쪽하늘로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남사당패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민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유랑연예집단이다. 원래 사당패는 여자들이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집단이었으나 조선 말기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생겨나면서 ‘남사당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중 안성 남사당이 가장 유명했다. 전국 3대 장(場)으로 알려진 안성장을 바탕으로 한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바우덕이라는 미모의 여성 꼭두쇠(우두머리)가 등장하면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오죽하면 안성 남사당이 뜬다는 소문이 돌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노래를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바우덕이는 본명이 김암덕(金岩德)으로 1848년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870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다섯 살 때 청룡사 인근 불당골에 기거하던 남사당패에 맡겨진 후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놀이를 익히게 된다. 당시 전국의 사찰들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청룡사에서는 사당패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남사당패는 공연을 하면서 먹거리며 현금을 조달해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호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우덕이는 열다섯이 되던 해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천한 신분이라 하여 관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 가마니때기에 둘둘 말려 근처 골짜기에 묻혔던 바우덕이의 묘는 한동안 잊혀 있다가 1989년 안성 남사당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 2001년 안성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유성문(2018)

바우덕이의 신화가 완성된 것은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공연이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동원된 노역자들을 위로하고자 남사당패를 불러 공연을 펼치도록 했는데, 그때 바우덕이의 춤과 노래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든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왔다갔다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기예를 칭찬하면서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했다. 이후 전국 어디든 바우덕이 사당패의 옥관자가 걸린 깃발이 등장하면 모든 사당패가 만장기를 숙여 예를 표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하지만 사당패거리를 패륜패속(悖倫敗俗)의 집단쯤으로 멸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직 나이어린 처녀의 몸으로 40∼50명에 이르는 남사당들을 이끌고 전국을 떠도는 일은 인기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바우덕이는 조선 유일의 여성 꼭두쇠에 오른 후 13년간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하지만 마침내 길에서 병을 얻어 스물셋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바우덕이가 타계한 후 안성 남사당은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다가 1982년 오함헌에 의해 ‘안성남사당풍물놀이보존회’로 재건되었다. 이후 안성시는 보존회와 함께 바우덕이풍물단을 만들고 보개면 복평리에 남사당전수관을 조성해 상설공연을 갖고 있으며, 해마다 가을이면 ‘바우덕이축제’를 열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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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성맞춤 남사당바우덕이축제’는 온라인 랜선축제로 열린다.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유튜브를 통한 온라인 중계를 시청할 수 있다(11:00-20:30). 이와 함께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안선 일원(안성맞춤랜드, 내혜홀광장, 안성천변, 서안성체육센터 및 승두천)에서는 ‘안성야경홀릭!’이 펼쳐진다.

안성맞춤, 청룡사와 칠장사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안성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안성맞춤이다. 매 2·7로 끝나는 날 서는 안성5일장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지만 삼남지방의 온갖 물화가 모이던 옛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안성사람들의 자부심만은 여전하다. 한때 개성·수원과 더불어 ‘조선 3대 장’으로 꼽혔던 안성장은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보다 두 가지(써레와 모)가 더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 명성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사람들은 장날이면 어김없이 장터로 몰려들어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도 북새통을 이룬다.

예전의 안성장은 놋그릇·가죽신·종이신·담뱃대·갓·한지·북 같은 수공품에다 쌀·배·포도 같은 품질 좋은 농산물 집산지로서 숱한 물상객주가 몰려들어 도가를 차릴 정도였지만 지금은 영판 쇠락해서 여느 시골장터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품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유성문(2018)

‘안성맞춤’은 안성 유기(鍮器, 놋그릇)에서 비롯되었다. 안성 유기가 다른 지방의 것보다 유명한 까닭은 서울 양반가들의 그릇을 도맡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성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유기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하나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이것을 ‘장내기’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관청이나 양반가의 주문을 받아 특별히 품질과 모양을 좋게 만들었는데 바로 ‘모춤(맞춤)’이다. 안성 유기그릇은 제작기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견고하고 광채가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까지 맞추어 내니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났다.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했던 안성 유기는 한때 20여 개 공방이 성업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사라져 현재는 4개 정도만 남아있다. ‘안성마춤유기공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유기장 보유자 김수영 장인이 아들 3명과 함께 전통 안성 유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유성문(2018)


바우덕이의 몸과 마음을 거두어주던 청룡사는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가 구름 속에 용이 노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주석하면서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이 ‘서운산 청룡사’ 현판 밑으로 여염집 문간 들어가듯 하면 되는 것은 누구나 부담감 없이 들어오라는 뜻일 게다. 원래 문을 지켜야 할 금강역사들은 대웅전 건물 추녀 네 모서리에서 보 사이의 불상조각들을 옹위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청룡사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제멋대로 생긴 부드러운 곡선미의 대웅전 기둥들이다. 있는 대로 생긴 그대로의 모습이 넓은 추녀와 더불어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바우덕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청룡사를 찾아보아야 한다. 청룡사는 큰 사찰은 아니지만 매우 아름다운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유성문(2018)


청룡사 깊숙이 불당골에는 바우덕이사당이 있다. 불당골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사당’이란 한글 현판이 붙은 사당은 그녀의 동상만이 홀로 지키며 남았고, 몸은 한참 떨어진 서운산 서쪽 자락에 묻혔다. 저자거리를 휘몰아 다니던 바람은 이제 고즈넉이 노을이 된 채로.

불당골 바우덕이사당에는 서보원 작가의 바우덕이 동상 ‘바람은 노을 되어’가 서 있다. 내가 본 가장 사랑스러운 기념조형물이다. ⓒ유성문(2018)


안성 바우덕이 기행을 칠현산 산기슭에 위치한 칠장사에서 마무리하는 것 또한 안성맞춤인 일이다. 민중의 애환 속에서 태어난 ‘임꺽정’의 전설이 스며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당시 가장 천대를 받던 백정의 신분으로 수탈과 억압에 못 이기는 백성들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의적활동을 벌인다. 그가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까지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갖바치(가죽장인)가 머문 곳이 바로 칠장사다. 그래서 임꺽정은 안성 땅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갖바치가 칠장사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깁는 법을 가르쳤던 가죽신은 안성의 또 다른 특산물이 된다. 또한 칠장사는 ‘미륵세상’을 꿈꾸었던 궁예가 어린 시절 외눈으로 활쏘기를 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7세기 중엽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칠장사는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명의 악인을 제도하여 모두 도를 깨달았다는 고사에 따라 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칠현인이 오래 머문 절이라 하여 ‘칠장사(七長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유성문(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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