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들어라, 갈잎의 노래
_서천 신성리 갈대밭
유성문 주간
승인
2021.11.10 20:00 | 최종 수정 2021.11.10 20:50
의견
0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전문
서천 신성리의 갈대밭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가을이 저무는 소리다. 그것도 서로가 몸 부비며 서럽고 시리게 저무는 소리다. 무릇 모든 것에는 그 끝이 있어, 끝은 처연하고 서글프다. 갈꽃이 시들 때 세월은 무참하고, 갈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추억조차 아스라하다.
목신(牧神) 판(Pan)의 연모에 쫓기던 순결의 요정 시링크스(Cyrinx)는 갈대로 변하여 몸을 숨긴다. 욕정에 눈먼 판은 그 갈대를 꺾어 피리를 불지만, 그것은 숨어 우는 바람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덧없는 사랑은 지고, 그리움만 소리로 남는다.
오비디우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당나귀 귀를 가진 미다스(Midas)왕의 비밀을 알게 된 이발사는 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비밀을 묻는다. 그러나 흔들리는, 생각하지 않는 갈대는 끊임없이 그 비밀을 전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삼국사기>는 더욱 비장한 은유를 들려준다. 보장왕을 폐위하는 데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그 표지로 갈대(蘆)를 모자에 꽂는다. 그 연유야 어떠하든 나는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사 42:3)’을 믿는다.
서천 신성리의 갈대밭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가을이 남기고 간 소리다. 갈잎의 서걱임 밑에 갈게는 바스락거리고, 겨울을 나려는 물오리의 날갯짓은 조용히 퍼덕인다. 생명이 다하는 곳에서 생명은 이어지고, 순환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순환은 시작된다.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 갈대밭은 전남 순천 대대포 갈대밭, 해남 고천암호 갈대밭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갈대밭이다. 비록 규모(5만여 평)에 있어 나머지 두 곳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서정적인 금강의 강변을 호젓하게 거닐며 가을사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영화 <JSA>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한산면의 한산모시관은 실제 모시의 직조과정을 둘러보고 질 좋은 모시제품을 구입할 수 있으며, ‘앉은뱅이 술’로 유명한 소곡주도 맛볼 수 있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금강하구둑이 나오고, 이곳에는 철새참조대가 세워져 있어 이제 막 찾아들기 시작한 겨울철새를 조망할 수 있다. 차를 타고 둑을 넘어 직접 군산으로 갈 수도 있지만, 장항 도선장에서 배를 타고 추억에 젖어 강을 건너는 맛 또한 각별하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