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가는 길은 끊겼다. 눈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의해서 끊어진 길. 그 오랜 세월 동안 분단의 아픔으로 남아있던 길. 그리움으로도 더는 갈 수 없던 길. 그 두께를 털고 겨우 실낱처럼 이어진 길마저 한 방의 총성과 함께 다시 끊기고 말았다. 이제 다시 금강산은 통일전망대에서 먼발치로나마 바라볼 수밖에 없는, 단지 ‘그리운 금강산’이런가. 언제일지 기약은 없지만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 그리움으로라도 그 길을 가자. 그 길 위로 눈 내리면 길을 잇기도 끊기도 하던 사람의 애증마저 모두 덮이고 말리니. 그 길목에서 만나는 눈 덮인 사람의 마을 하나-.
북방식 한옥이 잘 보존된 전통마을
1996년 4월, 그리고 딱 4년만인 2004년 4월 대규모 산불이 강원도 고성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죽왕면 일대의 야산 역시 대부분 새카만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재앙 속에서 털끝만치도 피해를 입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남은 마을이 있어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죽왕면 오봉리 왕곡마을. 이 오래된 마을은 마을 주변을 다섯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 움푹하게 들어앉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온통 불길이 번져가는 가운데서도 불길이 유독 이 마을만을 건너뛰었다는 것이다.
비단 두 번의 화재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때 폭격에 의해 일대가 초토화 되었을 때에도 이 마을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을에 떨어진 폭탄 한 발이 있었는데, 그조차 불발탄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왕곡마을이 전화와 화마마저 피해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마을사람들은 다섯 봉우리에 둘러싸인 마을의 지세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라 거듭되는 재앙을 용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 실지로 왕곡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배의 형국인 마을에 구멍을 내면 배가 침몰하는 재앙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양근 함(咸)씨 집성촌이다. 마을 유래는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한 역술가로부터 간성으로 가면 무너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간성으로 갔다. 이를 두려워한 이성계는 공양왕을 삼척으로 유배시키면서 자기를 따르던 신하 함부림(咸賻林)으로 하여금 도중에 공양왕을 살해토록 한다. 이때 부림의 아우 부열(賻說)은 형에게 왕의 시신만이라도 거둘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이를 수습한 후 간성으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형 부림은 개국공신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아우 부열은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다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탄압을 피해 지금의 왕곡마을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왕곡마을은 1988년 전국 최초로 전통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는 중요민속자료 235호로 지정되었다. 왕곡마을에는 100여 년 가까이 된 기와집 20여 채 등 50여 채의 전통가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왕곡마을이 이처럼 전통가옥들을 원형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해올 수 있었던 것도 마을의 입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큰길에서 불과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다섯 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 탓에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간 것은 물론, 새마을운동이라는 거센 개발바람에서도 비껴날 수 있었다. 실제로 왕곡마을은 바다에서부터 역시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아무리 파도가 센 날에도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997년 이곳을 둘러본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이처럼 전통가옥이 잘 보존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왕곡마을의 전통가옥들은 북방식 한옥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부분의 가옥은 ‘ㄱ자형’ 구조로 안방,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한 건물에 나란히 배치했다. 또한 부엌에 마구간을 덧붙여 놓아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긴 산간지방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했다. 관북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인 겹집형태에 따른 것도 이러한 지역적·기후적 특색에 기인한다. 특이한 것은 각 집마다 굴뚝 모양이 다르다는 사실인데, 비슷한 구조에서도 나름대로 개별적 멋을 추구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집은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올리고 드문드문 항아리를 놓아 굴뚝을 낸 곳도 있다.
또 다른 특색 중에 하나는 집 앞에는 담이나 울타리가 없고 집 뒤에만 견고한 담을 쌓았다는 것이다. 어차피 마을사람 거의 모두가 한집안이니 굳이 독립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대신,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공간인 부엌과 뒷마당만큼은 외부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금강산 가는 길
‘금강산 가는 길’을 가는 길의 기점은 의식적으로나마 속초의 청호동 ‘아바이마을’로 잡을 필요가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청초호를 끼고 있는 아바이마을은 오랫동안 실향민들의 마을이었다. 실향민처럼 그리움으로 절절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갯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들어간 마을에서 북녘 향토음식인 오징어순대를 씹으며 ‘금강산 가는 길’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본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청초호와 영랑호를 거쳐 고성 땅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곳이 바로 청간정이다. 청간정은 남한에서 보면 관동팔경의 최북단이자 고성의 관문 격이다. 이어 문암과 삼포 등의 해수욕장을 지나면 송지호가 나오고, 바로 그 호수 뒤편에 왕곡마을이 위치해 있다. 마치 칠곡처럼 고성군에는 ‘고성’이 없다. 원래의 고성읍은 현재 북녘 땅이고, 남쪽의 현 읍 소재지는 간성이다.
간성에서 가까운 ‘금강산(실제 위치한 산은 건봉산) 건봉사’는 금강산권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이 없었다. 한때 우리나라 4대 사찰 중 하나였고, 낙산사·신흥사·백담사 등 강원도 일대 대부분의 사찰들을 말사로 거느린 거찰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의 뜻을 받든 사명대사가 승병 6000명을 훈련시켜 위난에 처한 강토를 지켜낸 본산이고, 만해 한용운이 ‘봉명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도모했던 곳이기도 하다.
건봉사의 일주문 격인 ‘불이문’에 새겨진 금강저는 마치 절의 내력을 되새겨주는 듯하다. 금강저는 천둥과 번개의 신인 인드라가 사용한 무기였다. 하지만 인간의 악업은 금강저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절은 사그리 불타버리고 불타지 않은 석물들만 ‘잔재되어’ 남았다.
눈 쌓인 들판을 걸어갈제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뒤따르는 사람에게는 길이 되나니
-서산대사 <청허담집> 중에서
화진포는 또 어떠한가. 북이기도 했다 남이기도 했던 인간의 부질없는 역사는 김일성 별장이니 이승만 별장이니 하는 헛된 거푸집만 남겨놓았다. 게다가 전쟁의 정치적 당사자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거기에 이기붕 별장까지 ‘꼽사리’ 끼어 들어서있다. 이제는 고니조차 찾아들지 않는 화진포에서 그리운 금강산의 잔영이 아련한 통일전망대에 이르기까지의 발걸음은 사뭇 조심스럽다. 다시 번거로운 출입절차와 총 든 군인들에게서 느끼는 위압 탓이기도 하지만, 지금 더는 나갈 수 없는 그 길이 주는 교훈이 더욱 엄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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