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서있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 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서두
늦은 밤, 눈이 내렸다. 삼포로 가리라.
속초의 바다엔 한 행려병자의 거친 숨소리가 스며있다. 손창호. <얄개시대>의 이 명랑한 배우는 한동안 잊혀져 있다가 40이 훨씬 넘은 나이에 행려병동 입원환자의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는 한 방송 리얼 다큐 프로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PD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속초 바다요. 쪽빛 속초 바다를 보고 싶어요.”
그는 PD와 함께 속초 바다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쪽빛 파도가 일렁이는 속초 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비록 한줌의 재로나마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속초의 바다로 돌아갔지만, 아직까지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행려의 마음은 그 바닷가를 ‘삼포 가는 길’의 기점으로 삼는다.
…공사판을 떠도는 막노동꾼 영달은 일하던 공사장의 공사가 중단되자 밥값을 떼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막막한 길 위에서 그는 비슷한 처지의 정씨를 만난다. 정씨는 출소 후 고향 삼포로 가는 길이다. 그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지만, 영달은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들은 동행이 되었다.
영금정에서의 해맞이는 떠오르는 해보다 등 뒤로 번쩍거리는 설악의 잔영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새벽바람에 잠시 옷깃을 여민 행려는 청초호에서 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 거기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의 마을이 있다. 청호동 아바이마을은 함경도 사람들이 1·4후퇴 때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내려왔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모여 이룬 동네다. 그들은 청초호의 기슭에 나지막한 따개비집을 짓고 정처로 삼았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정처는 향수다.
…영달과 정씨는 주막에 들렀다가 그날 새벽 도망친 백화라는 작부에 대해 듣게 된다. 주막 주인은 백화를 잡아다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주막을 나선 두 사람은 역으로 가는 눈길 위에서 백화를 만난다. 백화 역시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고향은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인지도 모른다.
행려는 잠시 대포항 어물전을 떠돌다가 설악동을 애써 외면한 채 북으로 길을 잡는다. 청초호나 영랑호나 자연석호로서 구실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들은 그저 호수의 시늉으로 괴어있고, 청간정 역시 ‘관동팔경’의 낡은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오히려 그 바닷가의 처지를 실감케 하는 것은 녹슨 철조망이다. 철조망은 뭍과 바다의 경계를 막아서고 있지만, 어차피 파도는 철조망 밑에서 멈춰버린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꼼짝도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하는 백화를 영달이 업고 걷는다. 영달의 등에 업힌 백화는 어린애처럼 가볍다. 영달은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백화는 영달에게 넌지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영달은 애써 외면한다. 떠돌이생활이 이미 인에 박힌 마당에 정처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딘들 그들을 따뜻이 받아줄 것이며, 받아준다 한들 얼마나 배겨낼 수 있을 것인가.
아아, 정말 삼포가 있다!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하지만 그곳은 한적한 바닷가일 뿐이니 그리던 고향은 아니다. 오히려 영락없이 고향 같기만 한 왕곡마을은 눈 속에 푹 파묻혀 있다. 마음 급한 이들이 간혹 오가는 길을 내보지만, 그저 부질없는 짓일 뿐. 겨울의 한복판에서 급하게 나서야 할 일도 없고, 눈이야 기다리면 햇볕에 녹아내리리라.
…영달은 자신의 돈을 털어 백화를 먼저 떠나보내고 정씨를 따르기로 한다. 하지만 풍문에 전해들은 고향소식은 낯설기만 하다. 그곳은 이미 고기나 잡고 감자나 매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바다엔 방조제가 놓이고, 그 위로 트럭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공사판이나 다름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때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말미
다시 늦은 밤, 눈이 그쳤다. 돌아보면 멀리나마 봄이 따라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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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발표된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은 1960~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의 와중에서 고향을 떠나 소외된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 속의 삼포는 경북 경주의 감포를 모델로 했다고 하지만, 나는 ‘삼포’ 하면 강원도 속초와 고성군의 바닷가를 먼저 떠올린다. 같은 동해안이지만 그 일대의 바닷가들이 정처 없는 삶의 모습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고성에 삼포라는 지명을 가진 작은 바닷가 마을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화진포를 지나 그리운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니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을 그리며 가보는 그런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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