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많은 호법신장
새벽 3시. 산사의 하루는 도량석(道場釋)으로 열립니다. 지난밤의 질긴 꿈을 떨치고 도량 구석구석을 돌아보지만 사위는 여태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미망(迷妄)이고, 밤새 내가 덮고 자던 무명(無明)이기도 합니다. 어둠과 한기 속에서 외려 또렷한 것은 소리입니다. 발자국소리와, 한쪽으로 쏠리는 바람소리와, 끊어졌다 이어지는 고요조차 오롯이 소리일 뿐입니다. 뒤이어 나지막이 종성(鐘聲)이 울리고, 무명이 일어섰다 가라앉기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종성이 멈출 즈음, 무명은 끊어지고 지난밤의 꿈이 그냥 꿈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 문을 나서는데, 섬돌 곁에 호법이가 앉아있습니다. 호법이는 이제 네 살이 되는 덩치 큰 삽살개입니다. 호법신장(護法神將), 그러니까 이 절의 경호대장 격인 호법이는 사실 그 격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습니다. 어떨 때는 자기 발자국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산짐승이라도 만날라치면 지레 꽁무니를 빼기도 합니다.
문득, 호법이가 이 절로 처음 올라올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숨붙이 하나를 거둔다는 건 세간이나 절간이나 마음 쓰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먼 곳에 계신 불자 분이 강아지 한 마리를 올려 보내겠다는 뜻을 전해왔을 때 여간 망설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가엾어지면 주저 없이 돌려보내기로 하고 맞이하였는데, 뜻밖에도 강아지는 1개월밖에 안된 주제에 어지간한 중강아지 몸집을 지닌 놈이었습니다. 무성한 터럭하며, 마치 육계(肉髻)를 닮은 두상이며, 넉살마저 좋아서 절식구들은 그만 마음을 놓아버렸습니다.
그 후로 호법이는 예불시간이면 법당까지 들어와 같이 예불을 드리기도 하고, 먼데서 찾아든 불자들에게는 아랫절에서 윗절로 올라갈 때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답니다. 어느 날인가, 호법이의 눈을 덮고 있는 털을 답답하게 여긴 불자 한 분이 놈의 눈썹터럭을 밀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어색한 듯 멀뚱히 쳐다보는 놈을 보면서, 어쩌면 그 답답함이야 보는 이의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며, 호법이에게 베어져 나간 터럭자위 또한 처음부터 한낱 그냥 비어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알프스소녀 하모인
이제 아침공양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공양주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비록 조죽(朝粥)이라 할지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채움과 비움이 발우 안에 있습니다. 탁발의 정성으로 밥을 짓고, 수행의 마음가짐으로 배를 채웁니다. 발우가 비워지고 그곳에 있는 것이 이곳에 왔을 때, 하루의 울력을 위한 힘이 비롯됩니다.
아침공양이 끝나면 본격적인 산사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사이사이 사시불공과 점심공양, 약석(藥石)과 저녁예불, 그리고 길상수(吉祥睡)에 들기 전까지 수행 같은 울력과, 울력 같은 수행이 이어집니다. 요즘 가장 큰 일과는 장 담그기와 연등 만들기입니다. 지난해 이 산사에서 거둬들인 콩은 유기농으로 얻은 한 가마입니다. 그래도 시작만은 넉넉히, 여덟 가마를 더 사들여 모두 아홉 가마 양만큼의 콩을 삶고 메주를 쑤었습니다. 어쩌면 이 아홉 가마 양만큼의 장조차 다 나누어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기다리면 필요로 하는 이가 있겠지요. 연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랫절에서 150개, 윗절에서 40개,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마저 해 가기 전 다 걸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장독대를 둘러보는 사이, 절 아래 마을에 사는 모인이가 놀러왔습니다. 하모인. 산 아래 옥동초등학교에 다니는 이 아이는 올해로 4학년이 됩니다. 자기 동네에 또래가 없는 모인이는 곧잘 절로 올라와 놀다갑니다. 이 아이에겐 호법이도 나비도, 심지어 나까지도, 집에서 마실 거리 안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모인이는 가끔 영어책을 들고 와 내게 영어를 가르치려 듭니다. 모인이의 영어에 의하면 ‘바나나’는 ‘버너너’입니다. 워낙 산골짜기인지라 바나나 구경하기도 쉽지 않으련만, 이 아이는 그래도 연신 ‘버너너’를 외쳐대고, 나는 모인이가 하는 대로 ‘버너너’하고 따라합니다.
모인이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기를 따돌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제 흉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야, 너도 다른 아이가 없는 곳에서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지 않니?’하면, ‘아, 맞아!’하고 너무 쉽사리 수긍해버리기도 합니다. 모인이는 매일같이 그 먼 산길로 통학한 탓인지 달리기만큼은 학교에서도 선수 급이라고 합니다. 나는 모인이를 ‘알프스소녀 하이디’라고 부릅니다. 비록 이곳 망경대산이 알프스는 아니지만 모인이가 하이디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절 아래 마을인 예밀3리는 15가구 남짓 되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전에 제법 번창한 탄광촌이 있던 지역으로, 지금은 변변한 농사마저 지을 여건이 되지 못해 대부분 품을 팔아 살아갑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몇몇 분이 표고버섯을 비롯한 유기농 친환경농업에 힘을 쏟기 시작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마을에는 작지만 역사가 깊은 교회가 두 곳이나 있고, 당연히 목사님도 두 분이 계십니다. 마을 공동사가 있을 때, 항상 앞장서서 나서는 건 두 분 목사님과 우리 절 식구들입니다. 이곳에서 두 종교는 그렇게 서로 돕고 서로 헤쳐 나갑니다.
봄을 기다리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표고버섯 재배사를 둘러보다 때 이른 민들레 한 송이를 발견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민들레는 벌써 봄을 맞고 있었습니다. 산사의 농사라야 여직 아마추어 때를 벗지 못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버섯농사뿐만 아니라, 콩이며 고추 같은 작물들에 가시오가피, 두릅, 엄나무, 헛개나무, 머루에 복분자까지 양껏 욕심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자급 분을 빼고 가급적 약재 중심으로 재배에 나선 것도 다 아픈 이들을 생각하는 큰스님의 뜻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헛개나무를 전정하다 문득 윗절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포교당에 가신 큰스님이 저녁이면 돌아오겠기 때문입니다.
호법이와 함께 산길을 나섰습니다. 비록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군데군데 남아있는 잔설더미 때문에 윗절까지 오르기엔 족히 30분은 걸릴 듯싶습니다. 앞서가는 호법이의 꽁무니를 따라 올라가다가 불현듯 큰스님의 원력(遠力)을 생각해 봅니다. 거기 큰스님이 계시기에, 빈승은 예나제나 그 힘을 붙안고 기대여 가고 있습니다. 아직 큰스님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호법이는 큰 몸짓을 흔들어대며 마냥 즐겁게 산길을 오릅니다.
막상 윗절까지 다 오른 후에야 큰스님이 안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법이가 시무룩하게 법당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동안 나는 지고 온 배낭을 마루 위에 올려놓고 싸리비부터 찾았습니다. 마당이고 계단이고 어젯밤 흩뿌린 눈발 때문에 제법 미끄러웠습니다. 몇 해 전 오래 묵은 윗절을 헐어내고 중창불사를 시작했을 때 큰스님은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으셨습니다. 어설픈 인부들의 몸짓이 성에 차지 않으면, 그 인부들을 밀쳐내고 스스로 구들장만한 석재를 져 나르기 일쑤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큰일을 치를 뻔도 했습니다. 석재 하나를 등에 지고 오도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위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소리쳤습니다.
“아이고, 큰일 났다! 저러다가 공양주 스님이 쓰러지면 우리는 이제 밥 구경 하기는 다 틀렸다.”
어느덧 아득한 산자락을 타고 해가 넘어갑니다. 법당 앞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덧없는 빛일 뿐, 저 빛이 지고나면 사위는 다시 무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 산과, 저 산이 품고 있는 많은 것들, 멧돼지와 오소리와 너구리와 까치살모사, 더덕과 삽주와 고목나무에 붙은 운지까지, 숨 있는 모든 것들도 이윽히 제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산길을 오르는 중에 언뜻 보았던 생강나무의 꽃눈이 잠시 머릿속에 노란 빛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염화시중의 미소였을까요. 이 어둠을 뚫고 다시 빛이 솟아오르듯 소생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문득 추위를 뚫고나오는 꽃눈의 열기가 더욱 가까이에 느껴집니다.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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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 해발 1,089.9미터의 망경대산이 있다. 이 산은 단종을 섬기던 추익한이라는 선비가 비운의 임금을 그리며 멀리 한양을 바라보던 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꼭대기 못미처 해발 900고지쯤, 망경산사와 만경사가 있다. 아랫절인 망경산사에는 청하스님이, 윗절인 만경사에는 주지스님인 등인스님, 두 비구니가 각각 살림을 맡아 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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