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섬, 광장에서
_통영에서 묵고, 거제에서 노닐다
유성문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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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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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바다, 둥근 하늘 밑을 구른다/ 발 굴러도 그리 멀기만 한 그리움/ 속절없는 흰 거품으로만 돌아나오고/ 몽근 바다여, 나는 어디에도 없는데/ 노래마저 자갈 사이로 숨어드는지/ 추억조차 뱃전으로 비치어드는지 –졸시 <몽돌바다>
오는 봄빛 거슬러 남녘길 끝에 닿으니, ‘그리운 나폴리’ 통영이다. 남망산 자락 밑으로 통영 바다 통, 통, 통 거리며 포구로 돌아오고 있다. 청마의 깃발은 소리 없이 나부끼고, 이중섭은 아직 갯가의 벌거숭이들과 놀이를 끝내지 못했다. 부둣가를 떠도는 아베크족들, 쌍쌍이 심사를 어지럽히는데 윤이상의 무거운 음률은 선창 어느 곳에 가라앉아 있는지. 어두리 뚱보 할매의 속없는 김밥 먹으면 나는 어느새 수부(水夫)가 되어 있었다. 아아, 그래. 그리움은 죄가 아니다.
갈매기처럼 다리 건너뛰어 뭍도 섬도 아닌 거제를 노닌다. 갇힌 자들의 천국 포로수용소 터를 지나, 옥포를 지나, 장승포를 지나, 정자나무 아련한 지세포를 지나 어느새 학동이다. 그러고 보니 동백섬 지심도 하며, 안섬 밖 외도 모두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학동 동백꽃 그늘 아래 누워 팔색조 고운 자태 그려보고, 몽돌밭의 해조음(海潮音)으로 가슴 뒤척이면 여기가 바로 섬이고, 바다 아니던가. 날 저물어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그리움, 어둠을 뚫고 통영의 카바이드 불빛 속으로 되돌아갔다.
어딘들 떠도는 섬 하나 없으랴/ 그리움에 저미어 배는 바다를 가른다/ 날아라, 새여/ 희망도 사랑도 없이 저어온 세월로/ 나는 무겁다// 어딘들 발 디딜 섬 하나 없으랴/ 바람을 타고 넘어 다다를 섬 하나 없으랴/ 하여도 길은 아득하고 빛은 시리니/ 섬 밖의 섬, 바다 안의 바다에/ 나는 호올로 헤매인다 –졸시 <슬픈 뱃노래>
거제의 동백은 유난히 붉다. 그것은 온전히 눈부신 햇빛 탓이다. 옥포로, 장승포로, 지세포로 돌고 돌아도 햇빛은 아른거린다. 안섬이거나 밖섬, 물결로 일렁거리고, 마침내 학동에서 몽돌로 구른다. 지심도는 어떤가. 본섬에서 떨어져 나온 이 작은 섬은 아예 통째로 동백숲이다. 이 섬에도 어김없이 햇빛이 쏟아져 내리면 섬은 홀연 붉은 동백불을 밝힌 동백선(船)이 된다. 하지만 동백은 붉을수록 비감하다.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그토록 붉게만 타올랐다가 어느 날 툭 무너져버리는 빛의 종말을. 그 선연한 죽음을.
거제에 건너갔을 때, 나는 여차하면 여차에서 저문다. 섬의 끝, 여차에서 까마귀재를 넘어 무지개포구에 이르는 길은 시리도록 푸르다. 길은 망산의 옷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흐르는데, 길 밖으로는 영락없이 바다다. 점점이 떠도는 섬들과 그 사이를 떠다니는 고깃배들을 보노라면 문득 바닷새 아비가 떠오른다. 11월부터 3월 사이에 거제도 연안에서 겨울을 나는 아비는 바다 깊숙이 잠수하여 물고기를 잡는다. 때문에 어부들은 그 몸짓을 보고 물고기의 회유처를 알아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잠수에는 귀신인 아비지만 물 밖에서는 둔하기 짝이 없어 갈수록 그 수효가 줄어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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