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은 따로따로가 아니며, 노래는 삶과 일을 노래한다는 것을 나는 진도에서 알게 되었다. 진도가 갖는 원형들은 살아서 작동하는 원형들이다. 삶이 아무리 비속하고 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구원과 화해는 그 더러움 속에 살아있다고, 씻김굿의 무당들은 말하는 것 같았다. 삶 속에 노래가 들어있듯이 삶 속에 화해가 들어있으며, 아무리 더럽혀져 있다 하더라도 삶의 본래의 모습은 순결하고 평화로운 것이다라고, 씻김굿의 무당은 노래하고 있었다. -김훈 <원형의 섬, 진도> 중에서
2004년 나는 <주간경향> 지면을 빌어 진도의 할머니들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진도에서 만난 할머니들로 홍주 할머니와 소포리 어머니노래방 할머니, 그리고 초로에 접어들던 서망횟집 아주머니 세 분이 있었다. 그 후로 서너 차례 더 진도를 찾기는 했지만, 다른 일에 팔려 미처 할머니들의 안부조차 둘러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번, 관매도로 가는 배를 타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 잠시 서망횟집에 들른 적이 있기는 했다.
나에게 진돗개가 털 색깔에 따라 다섯 종자가 있음을 알려준 이는 진도 남쪽 끝자락 서망리에서 식당 겸 민박집을 하는 서망횟집 안주인 박향순 씨다. 그녀는 진돗개는 원래 백구(흰색), 황구(노란색), 흑구(검정색), 재구(회색), 호구(얼룩무늬)의 다섯 종이 있었는데, 백모와 황모가 마치 진돗개의 표준색처럼 여겨지면서 나머지 색들은 품질과 상관없이 차츰 도태되어 지금은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반가운 마음에 문을 박차고 들어갔지만, 무참하게도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밤이 새도록 진돗개에 관한 이야기며, 영등제에 관한 생각 등 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진돗개처럼 영민한 눈빛을 반짝이던 그녀를 기억하던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기억력은 흐려져 있었고, 몸마저 부쩍 쇠약해진 듯싶었다. 괜히 무안하고 착잡해진 나는, 그 후로 다른 할머니들을 찾을 엄두마저 애써 외면해버렸다. 나이 들면 하루가 다르다고, 행여 어떤 좋지 않은 소식이나 듣게 되지 않을까 은근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억세고 일 잘하고 눈물 많은
진도의 할머니들을 다시 찾은 것은 2007년이었다. 처음부터 할머니들을 찾을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 진도행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 영등제 기간도 아니었고, 토요민속기행도 휴지기에 들어가 있었다. 그저 유순한 남녘의 봄볕을 따라 내려온 나는 하릴없이 읍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시장 뒷골목에 자리한 허화자 할머니의 술도가를 떠올렸다. 말이 술도가지, 홍주를 빚는 할머니의 집은 정지(부엌)를 그대로 작업장으로 쓰는 담배가게를 겸한 낡고 오래된 슬레이트집일 뿐이었다.
홍주 할머니 허화자 씨 댁을 찾았을 때 마침 할머니는 술을 내리고 있었다. 수십 년간 그녀의 작업장이 되어온 정지는 장작불의 매캐한 연기와 지초향의 달착한 술내음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뭐할라고 이렇게들 찾아온다냐?” 할머니의 마중은 면박으로 시작되었다. 요즘 들어 더욱 버거워진 몸과 어수선한 심사 때문인지 할머니의 타박에는 곤고함이 묻어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새벽 같이 일어나 정갈한 마음으로 부뚜막 앞에 앉아야 했는데, 눈을 떠보니 벌써 9시가 넘어 있었다. 누구에겐지 모를 짜증이 밀려왔지만,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날은 좋아서 고조리(소줏고리)를 타고 내려오는 술방울이 묽어 엉기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래도 할머니가 부엌에 나앉아 있기라도 했었는데, 오늘은 부엌문마저 굳게 닫힌 채, 집안은 텅 빈 듯 괴괴하기까지 했다. 불현듯 요망한 생각이 들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마당을 서성거리는데, 집 한켠에 붙은 전방 방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할머니가 부스스한 얼굴을 내밀었다.
“어디서 오셨는가?”
할머니는 어제 답사차 들른 대학생 ‘애기’들과 초저녁부터 술을 펐다고 했다. 최근 들어 일하는 것도 갈수록 ‘뻗치고(힘에 부치고)’ 신경만 날카로워져서 적당히 농땡이를 치고 있던 차에, 젊은 것들이 찾아오자 그만 아무 생각 없이 어울려버린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그 많은 진도의 홍주 술도가들과는 달리 여전히 장작불을 때서 술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할머니의 자존심 섞인 고집이기도 했고, 나라에서 ‘봉급(무형문화재 지원금)’을 받는 데 대한 응당한 도리이기도 했다. 그만큼 일은 고되기만 했고, 그나마 최근 전수생 두엇을 두게 되면서 일손을 덜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마음 놓고 뒤로 물러앉을 처지도 아니었다. 불같은 성미는 여전해서 때론 전수생과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회장을 맡고 있는 홍주보존회 일로도 가끔 울컥하기도 하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는 바람에 숙모 밑에 얹혀 자라면서 술 내리는 법을 배웠다. 평생 바람기로 산 아버지에게 더 기댈 것이 없어서 열여덟의 나이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 역시 하고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워댔다. 어쩌랴. 그것이 잘난 진도 남정네들의 내력이려니 여기고, 혼자서 두 딸을 키우며 세상을 헤쳐 나와야만 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여느 진도 여인네와 마찬가지로 할머니 역시 억세고 일 잘하고 눈물 많은, 진도 여인의 성정을 고스란히 지니게 되었다.
설움도 세월도 시들어만 가고
소포리 노래방 할머니의 경우는 그래도 조금 나아보였다. 어머니노래방은 제법 자리를 잡았고, 작년 남도문화제에서 소포리 베틀노래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소포리 걸군농악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기쁨까지 맛보았다. 이제 어머니노래방에 나가서도 젊은 소리꾼들의 신명에 방해라도 될세라, 뒷자리로 슬쩍 빠져서 추임이나 할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한남례 할머니는 지산면 하보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소리꾼인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했고, 개구리 폴짝거리는 소리에도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의 신명을 타고났지만, 소포리로 시집온 후 매운 시집살이와 일에 치여 자신의 소질 따위는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눈먼 시할머니를 위시해 열두 식구에 이르는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면서, 염전일로 들일로 허리 펼 날이 없었다. 뒤늦게 남편을 군대에 보내기도 하고, 첫아이를 낳은 후 태어난 쌍둥이 시동생 둘을 키우기도 했다. 강보에 싸인 시동생을 업고 들일을 할 때, 그녀는 그리도 서러워서 소리죽여 소리로 울었다. (…) 설움을 소리를 낳고, 소리는 용서를 낳았다. 오십이 넘어서야 그녀는 눈치 보지 않고 제 신명대로 소리를 할 수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끼는 혼자 노래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마을 아낙네들을 불러 모아 ‘어머니노래방’을 여는 데까지 이르렀다. 비록 농한기에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소포리 노래방은 이 마을 여인네들의 유일한 도피처고 해방구였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내가 노래를 청하자, 서슴없이 밭고랑을 타고 서서 구성진 목소리로 육자배기 한 자락을 들려주었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오시는 임을 보내는 꿈아/ 오시는 임은 보내지를 말고/ 잠든 나를 깨워나 주지/ 이후에 유정님 오시거든/ 임 붙들고 날 깨워줄거나 헤-/ 내 정은 청산이요 임의 정은 녹수로다/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소냐/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잊어/ 휘휘 감돌아들거나 헤-
할머니의 육자배기 가락은 봄물이 든 밭고랑을 타고 넘어 들노래 중 상사소리로 이어졌다.
상사소리는 어디를 갔다가/ 때를 찾아서 다시온데/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지를 못하나니…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까워온다
아아,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듣고 있을 힘이 없었다. 김훈의 말마따나 몸짓을 잃어버린 들노래는 이제 무대로 올라갔지만, 그 노래의 몸을 이루었던 설움도 세월도 모두 그렇게 시들어만 가고 있는 것이었다. 몸짓이야 시늉으로나마 남게 되겠지만, 몸을 잃어버린 소리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들에서 실제로 몸짓이 이루어지고 있을 적에, 한 줄로 늘어서서 모를 심으며 뒷걸음질을 치니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가까워오는’ 것이었다. 그 뒷산이 행여 북망은 아닐는지, 나는 아득한 먼 산을 바라보며 공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_PS
진도홍주(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기능보유자 허화자 할머니는 2013년 타계했다. 향년 83세. 소포리 어머니노래방 한남례 할머니는 2019년 KBS ‘다큐공감’, 2020년 EBS ‘아주 각별한 여행’ 등에 출연하기도 했으니 아직은 정정하시리라 믿는다. 서망횟집 박향순 할머니의 근황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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